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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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친구로부터의 안부 전화를 받았다. 추석 명절에 보내는 선물 대신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값이 싼 인사치레는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그는 내게 물었다. 특별할 게 없는 나의 일상을 그가 모를 리 없건만 그와 같은 물음에 나 역시 '어떻게'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 떠오르지 않아 '잘' 지낸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나 스스로도 정확히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상을 어쩌면 나는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지나치는 가로수,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이마에 닿는 바람 등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배경을 묘사하거나 기록함으로써 그의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갈무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와 같은 지난한 작업에는 나름대로의 노력과 타고난 재주가 뒤를 든든히 받쳐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나의 생각이 결국 소설가 클레어 키건에 이르렀던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햇살이 화장대 발치에 닿을 때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 가방을 다시 들여다본다. 뉴욕은 날씨가 덥지만 겨울이 되면 추워질지도 모른다. 오전 내내 밴텀 닭들이 울었다. 그 소리가 그립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옷을 입고, 씻고, 구두를 닦아야 한다. 바깥은 들판에 이슬이 내려서 종이처럼 하얗고 텅 비어 있다. 곧 태양이 이슬을 태워버릴 것이다. 건초를 말리기 좋은 날이다."  (p.11 '작별 선물' 중에서)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가 설명하는 배경 묘사에 집중하며 읽어야 한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공간적 배경에 등장인물의 거의 모든 것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이나 결심, 기쁨이나 슬픔, 희망 혹은 절망 등 심리적인 것들 대부분이 작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등장인물을 둘러싼 배경에 의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은 책을 읽는 독자들을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시키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흐름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그것은 마치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메마른 논에 물꼬를 트는 일처럼 간단하고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배경이 되는 풍경이나 사물을 통해 등장인물의 심리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결코 가볍게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조금 있으면 아침이었다. 흔들리는 커튼을 회색빛이 액자처럼 감쌌다. 집은 바람 구멍이 숭숭 난 덫이었다. 바깥에서는 강풍이 불고 있었다. 마거릿은 집 앞에 자란 기다란 풀을 눕히는 바람 소리에 익숙했지만 나무를 뒤흔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어색했다. 그녀는 집 근처에서는 어떤 씨앗도 뿌리를 내리고 당단풍으로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런 더나고어에 절대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피 냄새가 났다. 그녀는 아직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었던 것이다."  (p.203 '퀴큰 나무 숲의 밤'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푸른 들판을 걷다'를 비롯하여 '작별 선물',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 '퀴큰 나무 숲의 밤' 등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일랜드 남자들의 개별적인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이 소설집은 클레어 키건이라는 걸출한 소설가에 의해 아일랜드인의 일상이 재해석되고, 일부는 삭제되고 또 일부는 크게 부각됨으로써 국적이나 세대를 떠나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에 맞닿게 된다. 아버지로부터 오랫동안 성적 학대를 당했던 딸이 성장하여 결국 집을 떠나는 장면을 그린 '작별 선물'이나 가진 것이라곤 빚으로 산 집 한 채가 전부였던 사내가 가정을 뒷전으로 한 채 자신의 집을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등은 과거 우리나라 아버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이 이혼 절차를 밟는 동안 그를 데리고 살았던 할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부재를 느끼지 않은 적이 하루도 없다. 할머니는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절대 그 차에 올라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느니 거기 남아서 거리의 여자가 되겠다고. 할머니는 남편에게 자식을 아홉 명 낳아주었다. 청년이 차에 다시 탄 이유를 묻자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땐 다 그랬어. 난 그렇게 생각했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줄 알았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스물한 살이고, 이 지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하버드에서 A학점을 받았고, 달빛 속에서 아무런 시간제한도 없이 해변을 걷고 있다."  (p.156~p.157 '물가 가까이' 중에서)


일상을 일목요연하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나는 그의 질문처럼 '어떻게' 지낸다고 답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벽에 걸린 달력이 8월에서 9월로 옮겨오고, 하늘의 구름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아파트 화단에 핀 맥문동의 보라색 꽃대도 희미하게 시들고 있다. 가을 늦더위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을 뿐 시간은 꽤나 빠르게 흘러간 듯 주변 풍경도 크게 변하고 있다.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배경을 묘사하거나 기록하지 않는 탓에 나는 다만 '어떻게' 지내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라는 일상 속으로 클레어 키건이 설명하는 과거 아일랜드인의 일상이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친구여, 나는 다만 '어떻게' 살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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