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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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설정하는 주인공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때가 있다. 주인공의 나이며, 성격이며. 외모며 가족 관계, 심지어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지역의 기후나 환경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창조되었거나 유도된 것은 하나도 없는 까닭에 작가의 의도는 소설 속 각각의 인물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설정에 고스란히 감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소설 속 인물의 작은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혹은 구성원 상호 간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작가가 구성한 주변 환경에 있어서의 미세한 변화마저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평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 독자가 이 모든 것을 세밀히 다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SF 판타지 소설 <펭귄 하이웨이>는 책의 볼륨에 비해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구성 자체가 복잡하지 않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인물의 성격이나 배경, 주인공이 관찰하고자 하는 연구 대상(이 책에서는 '바다', '펭귄', '재버워크' 등) 및 주인공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변화를 감지하고 기억하면서 책을 읽지 않으면 SF 판타지 소설로서의 이 책에 대한 가치나 재미는 조금쯤 경감되거나 잃게 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 빠져 술술 읽다 보면 각각의 인물이 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였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순간이 종종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가 나보다 이해력이 뛰어난 까닭에 그럴 염려는 나만의 기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오늘 계산해보니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3000하고도 888일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나는 3000하고도 888일을 나날이 훌륭해지는 거다. 그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 너무 훌륭해져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모두들 깜짝 놀랄 거다."  (p.10)


인공 이름은 아오야마, 초등학교 4학년의 10살 소년이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오야마는 애라기보다 애늙은이에 가깝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낮에 머리를 너무 많이 쓴 탓이라고 항변하지만 9시만 되면 졸음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치료차 들르는 치과병원의 간호사 누나를 남 몰래 짝사랑하기도 한다. 아오야마의 학구열과 애늙은이 같은 태도를 치과 누나는 귀엽게 봐준다. 아오야마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휴대하는 노트에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매 순간의 결과는 집에서 다른 노트에다 주제별로 정리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연구 주제는 '좋아하는 치과 누나'에서부터 '상대성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펭귄'과 하늘에 돔과 같이 생긴 '바다' 그리고 숲에서 보이는 '재버워크' 등 최근에 아오야마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갑자기 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치과 누나가 콜라 캔을 펭귄으로 변하게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누나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걸 염려한 아오야마는 이것을 철저히 숨긴다. 학교에서 그와 함게 연구를 하는 단짝 친구 우치다와 체스 소녀 하마모토에게도. 그러나 숲에 돔 모양으로 하늘에 떠 있는 '바다'가 수축과 팽창을 함에 따라 치과 누나의 건강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는 아오야마. '바다'는 결국 주민들을 위협할 정도로 팽창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제멋대로이고 어리광쟁이였던 시절, 나도 여동생과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언젠가는 죽어 만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모든 생물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나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내가 아무리 운이 좋아도, 내가 아무리 싫어도, 절대로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300)


단순한 재미를 떠나 이 소설은 얼핏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성장 소설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한다. 그러나 아오야마를 해변의 카페에서 수시로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치과 누나를 비롯하여 좋은 친구처럼 대하는 아오야마의 아빠에 이르기까지 책은 아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가 어떤 태도로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아오야마의 아빠는 엄마라면 금지했을 커피를 아들과 마시고 어른들이나 좋아할 민트가 들어간 초콜릿을 권하는가 하면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잊지 않는다. '문제를 작은 문제들로 쪼개고, 다른 각도에서 문제들을 바라보고, 닮은 문제를 찾'으라고 권한다. 아오야마는 대상을 '누나'와 '펭귄'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고 말고. 세계의 끝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단다. 웜홀도 그렇지 않을까? 너랑 아빠 사이에 있는 이 테이블 위에 실은 웜홀이 이미 출연했을지도 몰라. 그건 정말로 한순간의 일이라서 우리한테 안 보이는 것뿐일 수도 있어."  (P.252~P.253)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진정한 어른다움은 아마도 앞에 있는 대화 상대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공감하며, 진심을 담아 경청하는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른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 주변에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는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아버지뻘의 지인이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었다. 그분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삶을 낭비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 이제는 자네도 그럴 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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