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4주년이 되었던 날. 나의 선친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6.25 참전 용사 중 한 사람으로서 현충원에 안장된 까닭에 이날만큼은 각별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다소 풀어졌던 남북 관계는 현 정부 들어서면서 긴장의 강도가 최대치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전쟁이 터져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살아볼 만큼 살아본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들이야 전쟁이 발발하여 내일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크게 아쉬울 게 없겠으나,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크나큰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의 희생자가 60세 이상의 나이 든 사람으로 한정되지 않는 까닭에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일은 작금의 기성세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며칠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화성의 리튬전지 공장에서 일을 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화재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고, 탈북인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보복으로 수백 개의 대남 오물 풍선이 날아들었습니다. 게다가 북한의 김정은과 러시아의 푸틴이 만나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과거의 냉전체제로 복귀한 듯한 느낌이 들게 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이와 같은 변화에 속수무책 먼 산만 바라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굵직굵직한 뉴스에도 불구하고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지난 16일 전북의 한 제지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19살 노동자의 죽음이었습니다.
전북 전주의 한 제지공장에서 숨진 19세 노동자의 생전 메모장 내용. 민주노총 전북본부 제공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을 거쳐 6개월 전 정직원으로 입사했다는 A군의 메모장에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여러 계획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가 정한 2024년 목표는 '남에 대한 얘기 함부로 하지 않기', '하기 전에 겁먹지 않기', '기록하는 습관 들이기', '구체적인 목표 세우기', '친구들에게 돈 아끼지 않기' 등이었습니다. A군과 비슷한 또래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나로서는 메모지를 읽는 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성 곱고 아름다웠던 청년이 자신의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뻘 되는 나이의 나 역시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와 같은 계획은 단 한 번도 세워보지 못했던 까닭에 슬픔과 함께 가슴 한편으론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박태균 교수가 쓴 <버치문서와 해방정국>을 읽고 있습니다. 미군정 시기에 한국에 배치되어 주로 한국의 정치인들을 담당하는 미군정 정치고문단 소속으로 활동했던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중위. 그가 남긴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의 어른이자 기성세대였던 정치인들은 참으로 어리석고, 오직 자신의 출세밖에 모르던 한심한 작자들이었습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덮어놓고 뭉치자."라고 했지만, 실상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 덮어놓고 뭉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 (p.72)
통합을 주장하지만 실상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은 철저히 배격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있었던 까닭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어리석은 정치인들만 있는데 이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