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 전면 개역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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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읽을 책이 쌓인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배가 불러 결국 다 먹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라도 여러 반찬이 놓인 밥상은 언제나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것처럼. 게다가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나 3권 이상의 장편 소설이라도 보일라치면 고되고 긴 여정을 앞에 둔 순례자처럼 괜스레 설레는 것이다. 최근에 나의 책상 위에는 다 읽어서 치워지는 책보다는 읽기 위해 새로 올려지는 책이 더 많았던 까닭에 책상은 수시로 난장판이 되곤 했다. 이 책 저 책을 꺼내 읽다가 읽던 쪽을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름 남짓 위치를 바꿔가며 책상 위를 떠돌던 책이 허먼 멜빌의 대작 <모비딕>이다. 나는 김석희 작가의 개역판 <모비딕>을 앞에 놓고 책의 화자인 이슈메일과 함께 문제의 포경선 '피쿼드호'에 탑승하였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게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p.43)


육지 생활에 염증을 느껴 뉴욕 맨해튼을 떠나 동부의 낸터컷에서 피쿼드호에 탑승한 이슈메일 일행은 추운 크리스마스 날 운명의 항해에 나선다. '신과 같은 남자' 선장 에이해브는 한쪽 다리를 잃고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했으며 모비딕을 향한 복수의 일념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에이해브 선장은 무리한 항해를 말리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의 충고를 뿌리치고 모비딕을 끝까지 쫓는다. 대서양에서 출발한 배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그리고 마침내 태평양에 도달한 그들은 모비딕과 대면하게 된다.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곶을 돌고 노르웨이의 마엘스트롬을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놈을 추적하겠다. 그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곳곳에서 그놈의 흰 고래를 추적하는 것, 그놈이 검은 피를 내뿜고 지느러미를 맥없이 늘어뜨릴 때까지 추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이다... 나는 놈에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흰 고래가 앞잡이든 주역이든,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 것이다. 천벌이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마라.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다. 태양이 나를 모욕할 수 있다면 나도 태양을 모욕할 수 있을 테니까."  (p.250~p.251)


1800년대에 쓰인 이 소설은 사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듯 어색하고, 대화에 있어서도 신파적인 요소가 다소 눈에 띈다. 그러나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명상을 각각의 인물에 투영하여 어색하지 않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소설은 존재적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실제로 포경선에 승선하였던 경험과 해군 수병으로 복무하였던 경험 등 파란만장했던 작가의 경험이 밑바탕이 된 까닭에 소설에서 작가는 포경업에 대한 지식적 탐색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지나간 네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아득한 곳에서 밀려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더욱 높게 일게 하라!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너와 끝까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너를 찌르고,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증오를 담아서 뱉어주마. 관도, 상여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상여도 나에겐 소용없다. 저주받을 고래여, 나는 너에게 묶인 채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이 부서지겠다. 자, 이 창을 받아라!"  (p.760)


같은 소설을 읽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소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소설에 대한 평가는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시대적 배경과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 현대의 관점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를 평가한다는 건 여러 면에서 모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소설 <모비딕>이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읽힌다는 건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인간 본성과 불굴의 의지가 세대를 건너 감동을 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작살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p.403)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되는 날. '인간은 누구나 작살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는 동안 10년 전의 세월호처럼 '죽음으로 급선회'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보름 남짓 내 책상 위에서 장식품처럼 뒹굴던 <모비딕>을 치우며 10년 전 오늘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학생들과 많은 희생자들을 생각했다. 피쿼드호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였던 이슈메일. 화자인 이슈메일의 타임라인을 따라 전개되는 장대한 이 소설이 오늘따라 슬프게 읽혔던 것도, 보름 남짓 정들었던 책의 표지를 나도 모르게 쓰다듬었던 것도 소설 속에 쓰러져가는 세월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일 터. 하늘엔 뿌옇게 황사먼지가 떠돌고 나는 어쩌면 눈물 한 방울 흘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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