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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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올랐던 선거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았던 만큼 집권 여당에 대한 반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선거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그러나 높았던 선거 열기는 투표함의 뚜껑이 열리고 방송사의 개표 방송이 시작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고 말았다. 한 표의 권리를 행사했다고는 하지만 국민 각자가 선거에서 누릴 수 있는 더 이상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바라던 결과이든 아니든 그저 묵묵히 수용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 능동적인 유권자의 입장에 있던 모든 국민들을 무기력하게 했다. 미력하나마 국가와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 힘을 미칠 수 있다는 능동적인 입장에서 주어진 결과를 그저 묵묵히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수동적인 입장으로의 태세 전환을 요구받는다는 것은 영 마뜩잖은 일이었다.


"두 가지 비관적인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맹목적인 충동을 다 만족시켜주지 못해 삶은 늘 허기와도 같은 고통을 겪는다. 반대로 이 충동이 쉽게 충족되는 경우엔? 삶은 좌표를 잃고 무료함에 빠지게 된다.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권태와 무료함. 인생은 어디로 가든 이 두 가지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p.187)


서동욱 교수의 저서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지금처럼 마음이 헛헛한 시기에 읽기 좋은 책이다. 정부의 실정과 무능함에 대한 분노가 투표라는 일회성의 행사를 통해 분출된 후 과도하게 흘러넘치던 에너지는 사막의 와디처럼 말라 있었다. "당신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비롯된 날씨를 만든다는 착상은 서강대 철학과 교수인 서동욱에게 이른다. 국내 최고의 들뢰즈(Gilles Deleuze) 사상 연구자이자 시인과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저자는 이 책에서 철학, 문학, 미술, 영화 만화, 게임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을 오가며 자신이 정한 마흔 편의 소제목에 철학적 재미를 더한다.


"AI는 문학 작품이든 미술품이든 만들어낸다. 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고, 홀릴 수 있으며, ‘유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작품의 수준이 높냐 아니냐, 독창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유혹이 예술의 영역에 그칠까? 일단 유혹의 기술을 배우면 그 적용 범위는 한없이 넓어진다. AI가 유혹의 문제라는 것은, AI가 칵테일이나 요리 레시피에 대해서까지 독자적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최고의 레시피를 제공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최고의 기준인지 우리는 결코 답하지 못한다. 관건은 AI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인간을 유혹할 것이고, 결국 적응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p.168)


1부 '우리는 성숙할 수 있을까', 2부 '세상을 견뎌내기 위하여', 3부 '위안의 말', 4부 '예술과 세월과 그 그림자'의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무엇보다 철학적 설명을 위한 다양한 영역의 소재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를 통하여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철학이라는 영역은 사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책을 읽다가도 자칫 흥미를 잃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한눈을 파는 독자를 저자가 끝없이 유혹하지 않으면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책장에 꽂힌 책을 보더라도 철학 분야의 서적은 앞의 몇 장만 손때가 묻어 더럽혀졌을 뿐, 나머지 부분은 처음에 구입했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깨끗하게 유지되는 게 일반적이다. 책에 실린 몇몇 소제목만 예로 들어도 저자의 노력을 알 수 있을 듯하다. '기생충의 예술과 철학', 남녀관계는 평생의 학습을 요구한다', '인공지능과 인공양심', 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정치' '유머', '혼밥', '환생 이야기', '레트로 마니아 또는 수집가' 등 저자가 늘여놓은 관심의 촉수는 다양하고 넓은 세대에 걸쳐져 있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반복이 새로움의 조건이라는 것은 산책의 귀중한 동반자인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매번의 산책이 세상에서의 첫날인 것처럼 구름이는 너무 신나서 걸어간다.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p.180)


많은 사람들이 철학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까닭은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 철학이 우리의 삶에 대한 어떠한 질문에도 명쾌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열이면 열, 각자의 삶이 제각각인 것처럼 그에 대한 해답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은 결국 우리들 각자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알려줄 뿐 각자에게 맞는 수백, 수천 가지의 해답을 각자에게 떠먹여 주듯 일일이 알려주지는 못한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어떤 현상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미지의 세상에 대해 가눌 수 없는 호기심을 갖는 동물이다. 결국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질문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바른 대답, 긍정적인 해답을 내놓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화창하고 따뜻한 오늘의 날씨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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