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책이 좋아서 - 책을 지나치게 사랑해 직업으로 삼은 자들의 문득 마음이 반짝하는 이야기
김동신.신연선.정세랑 지음 / 북노마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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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책이 좋아서'라고 하면 '하필'이라는 부사에 먼저 눈길이 쏠린다. '그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이면 책을 좋아하다니!'라는 한탄과 함께 '다른 좋은 것도 많은데'라는 선행 어구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하필 책이 좋아서'라는 말 속에는 말하는 이의 가치 판단이 함께 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이라는 무용한(혹은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는 것에 대한 자조가 짙게 배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처럼 '하필'이라는 단어 속에 깃든 여러 의미를 모를 리 없을 텐데 굳이 이 단어를 쓴 데에는 어떤 특별한 까닭이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역시 이미지는 좋지만 결국 돈은 안 되는 게 책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책을 주제로 하는 TV 프로그램이 꾸준히 생기면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어떤 유명인이 읽고 있다는 책에는 반짝 관심이 쏟아지지만 그 책이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징검돌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도 같고. 전직 대통령이 국내 최고의 출판 마케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실정이니 출판 시장 진짜 어떡하지......"  (p.213~p.214)


<하필 책이 좋아서>의 저자인 세 사람은 '하필 책이 좋아서'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가장 느린 미디어인 책을 만드는 일에 열정과 정성을 다하는 이들. 그러나 그들에게도 갈등과 머뭇거림의 순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저작, 편집, 디자인, 홍보, MD, 콘텐츠 제작 등 한 권의 책이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하나의 상품으로 완성되어 판매될 때까지의 과정과 단계들이 여느 상품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들 세 작가의 시선은 '출판계' 안쪽을 향하기도 하지만 책의 인기가 날로 시들해지는 '출판계 바깥의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하소연이기도 하다.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 <시선으로부터> 등 쓰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사랑과 주목을 받고 있는 정세랑 작가의 주도로 출판사 홍보 기획자로 로 일하다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신연선 작가, 출판사 돌베개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현재는 기획자 및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신 작가와 함께 쓴 이 책은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좋아하는 동료들과 작은 책을 쓰고 싶었다. 신연선 작가, 김동신 작가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흔쾌히 맞잡아주었다. 세 사람 모두 10년 차에서 20년 차를 향해 기고 있는 업계의 허리 세대에 속한다. 꾸준히 걸어왔지만 남은 길도 많은 상태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이야기를, 그다지 무겁지 않게 해보고 싶었다."  (p.7 '들어가는 말' 중에서)


추천사, 증정본, 개정판, 리커버, 굿즈 등 출판사와 함께 작가가 결정해야 하는 것들에서부터 작가에게 오는 강연 요청이나 문학상 심사 등의 문제, 젠더, 환경, 문화 정책, 취향, 북디자인, 로고, 계약(서), 기획, 홍보, 마케팅, 베스트셀러, 브랜딩, 덕질 등 독자들은 모르고 있거나 관심 밖에 있는 문제들이 가벼운 터치로 다루어진다.


"책은 대표적인 다품종 소량 생산 상품이지만 예상치 못한 악성 재고는 발생하기 마련이며, 유통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파본도 생긴다. 파쇄해버리기에는 아까운 책들을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이 살짝 구겨지거나 더럽혀져도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인데, 못난이 과일을 즐겨 먹는 소비자가 있는 것처럼 차본을 파쇄에서 구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도 있을 것이고 효율적인 연결 방법을 생각해보고 싶다."  (p.72)


오늘은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밖에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만개한 목련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가 문득 떠오른다. 오늘처럼 궂은 날씨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귀가를 서둘렀고,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학교에서 빌려왔거나 친구에게서 빌려온 책을 붙잡고 밤이 깊을 때까지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곤 했다. 아귀가 맞지 않아 벌어진 문틈으로 스며드는 비 비린내와 똑똑 처마에서 떨어지는 밤의 낙수 소리.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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