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두 번째 원고
김혜빈 외 지음 / 사계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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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는 여전히 쌀쌀하지만 연일 꽃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봄은 봄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니 아파트 화단에도 산수유꽃이 새초롬하니 피었다. 계절의 변화에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산수유꽃의 개화는 늘 놓치고 만다.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슬쩍 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대지가 꿈틀대는 이맘때면 나는 '아, 소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설레곤 한다. 봄이 우리에게 급격히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소설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장 먼저 드러내는 '문학계의 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발간한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은 이 봄에 맞춤처럼 찾아온 소설집이다. 신춘문예 등단작가 5인의 단편소설과 에세이가 각각 한 편씩 실린 이 책은 신예작가의 시선이라는 점도, 소설과 에세이가 동시에 실렸다는 점도 무척이나 신선하다. 마치 이제 막 피어나는 봄처럼 말이다. 먼저 책에 실린 단편소설을 살펴보면 평범한 인간들 속에 소수자로 살고 있는 늑대인간을 그린 '솔리터리 크리처', 사라진 가족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정원사', 한 사람의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권능',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인 기우와 이혼 소송 중인 탁구 강사 호정을 통해 우리가 맺고 있는 허망한 관계를 바라보게 되는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가까운 사이로 존재하지만 두 사람의 속마음은 두려울 정도로 서로 다른 '이주'가 김혜빈, 김사사, 공형진, 하가람, 신보라 작가가 쓴 단편소설이고 뒤에는 이들 각자의 에세이가 한 편씩 실려 있다.


"호정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담장 아래 떨어진 살구를 줍는 탐정의 얼굴을.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열매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모습을. 전날 짓무른 과육에서 느껴지던 미끄덩한 식감과 신맛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을 먹으면 배탈이 날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 바닥에 떨어뜨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까지도. 그러면서도 혀 아래로는 침이 고인다."  (p.129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중에서)


"우리의 약속이 세 가지로 늘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이주와 함께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주는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우울한 거야, 내려다볼 줄도 알아야지, 하며 중얼거렸다."  (p.158 '이주' 중에서)


각각의 소설은 우리가 알던 틀에서 조금씩 어긋나 삐걱거린다. 새로운 근육을 썼을 때의 어색함처럼 혀에 착착 감기는 익숙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도, 글을 완성해 가는 방식도 기분 좋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이 순간처럼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설렌다. 이들도 언젠가 자신의 문체와 구성 방식에 익숙해져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글이 원숙해질지언정 늘 신인의 자세로 새로움을 추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인데. 나는 자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다가 어쩌면, 아무것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다가 내가 쓰고 있는 글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아무것이든 상관없다의 반복.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은 아무것이든 상관없음과 싸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일이란 어쨌든 싸우는 일. 승패는 나의 몫이 아니다. 결국에는 '도'와 '든'의 반복."  (p.188~p.189 '신보라의 ''도'와 '든'으로 살기' 중에서)


책에서 선보인 다섯 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허상과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시도하고, 상처를 입고, 회복기를 거쳐 다시 또 도전하기에 이른다. 삶이란 관계와 관계 맺기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까닭에. 끊임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우리는 끝없이 관계를 맺고, 상처를 입고 헤어지며, 다시 또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모두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부러워하는 평범한 소시민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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