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오다 -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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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보다 부업을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피디이면서 동시에 작가인 사람들도 섞여 있는데 김현우 피디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다큐멘터리 피디이자 번역가인 그는 작가로서도 손색이 없는 듯 보인다. 손색이 없다기보다 뛰어나다. 한 가지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고... EBS 《다큐프라임》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 몇몇을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과 해야 할 일을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피디와 작가는 서로 닮아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전달하는 매체가 영상과 언어라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책 한 권으로 묶일 만큼의 글을 써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동안 뭔가가 정리되기는 했다. 글쓰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직업이었다. 대충 삼십대의 시기와 겹치는 십여 년을 이렇게 정리해보고 나니 뭔가 더 분명히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삶은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건 좀처럼 자신이 생기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p.253 '에필로그' 중에서)


작가의 본업인 다큐멘터리 기획 및 촬영을 위해, 그리고 잠시의 짬을 내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기록한 글을 책으로 엮은 <건너오다>는 작가가 다녀온 17개국 38개 도시를 선별하여 실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프랑스 파리나 영국의 런던 등도 있고, 미국의 로렌스, 앤아버, 미즐라와 호주의 마운트아니자, 필리핀 아닐라오 등의 이름도 생소한 도시들도 나온다. 특이한 것은 작가가 연출했던 작품 <김연수의 열하일기>의 배경이었던 중국의 변문진과 진황도 등의 기록도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일반 에세이스트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지명들이다.


"과거의 국경이었던 곳, 지금은 그런 과거를 전혀 모른 채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변문진의 일면산역에서, 경계를 넘는 방법을 생각했다. 경계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경계가 아니라 경계 앞에 선 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욕심이고, 욕심의 다른 이름인 미련 혹은 집착이고, 두려움이다. 장백산 담배 한 개비가 확인해준 사실이다."  (p.236)


육체의 성장은 시간과 영양을 공급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이나 영혼의 성장은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이나 애정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거기에는 반드시 여행과 같은 개인의 적극적인 체험이나 노력이 덧붙여져야만 한다. 어느 낯선 여행지에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삶의 허무나 고독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전보다 한 뼘 더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넓어진 마음의 여백을 지워지지 않는 삶의 의미로 채워가야 한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버린 나가사키의 도심을 폐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그곳을 '버리지' 않았다. 폐허는 오히려 나의 마음속 정경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버리다'라는 단어는 어쩌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어감만큼 잔인한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버림은 어쩌면 무관심의 동의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건 '(버림받는 대상에 대한 악의를 품고) 망가뜨리다'의 의미보다는, '적극적으로 지켜주거나 돌보지는 않는다'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적극적인 관심 혹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폐허가 된다. 상점들이 문을 닫은 나가사키의 도심에서 나의 마음이 '폐허'라고 느낀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다."  (p.195)


작가의 사색이나 체험의 기록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은 어쩌면 그가 존 버거와 같은 대가의 책을 여러 권 번역하고, 그것을 의미가 통하도록 수차례 반복하여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던 것처럼 한 권의 책을 써냈다고 그의 삶이 크게 달라질 거야 없겠지만 영혼이 성장하는 만큼 넓어진 마음의 여백이 허무와 공란으로 남지 않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키를 집안 문틀에 새겨 넣는 것처럼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다는 것은 영혼의 성장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이 쓴 책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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