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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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건 어쩌면 마음만 분주한 상태, 혹은 마음이 어수선하여 집중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최근 며칠이 그랬다. 나는 어느 한 곳에 진득하니 앉아 하나의 일을 마무리 짓고 이어서 해야 할 다른 일로 넘어가는 평범한 과정을 잊은 채 이 일에 조금 손을 대다가 또 다른 일에 잠깐 손을 보태고, 그러다가 갈팡질팡 목표를 잃고 헤매기를 반복하면서 성과도 없는 나날을 보냈었다. 지나고 나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반복했을까' 하는 때 늦은 후회가 밀려오게 마련이지만 사람의 일이란 늘 '지금'보다는 지난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더 관심이 있는 까닭에 자신이 뭔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지나고 나면 곧바로 후회 모드로 돌입하면서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무엇 하나 유쾌한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름답지도 푸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늘 생각나는 것은, 그 여름날의 일이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내가 침울한 여자아이였다는 것.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와무라 히로토. 보라색 립스틱. 엉뚱한 것만 믿는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였다는 것."  (p.39 '뒤죽박죽 비스킷' 중에서)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평범한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하여 한 컷의 스냅사진처럼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물론 단편소설을 쓰는 수많은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만큼 작가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순간순간의 감정과 표정을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삶의 덧없음과 비애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가을날, 감기에 걸린 가족 누군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재즈 가수의 구슬픈 목소리를 닮아 있다고 느꼈던 것도 목소리에 담긴 약간의 습기마저 걷어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강도는 더욱 증가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나츠키를 데리고 언젠가 파리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밤, 파리에서 걸쭉하고 뜨거운 생선 수프를 먹여 주고 싶다. 바닷속 생물들의 생명 같은 맛이 나고 온갖 향신료의 맛이 섞인, 뼈까지 영양이 녹아드는 생선 수프다. 나는 그 풍요롭고 행복한 음식을 다카시가 아닌 남자에게 배웠다."  (p.190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중에서)

 

표제작인 '울 준비는 되어 있다'를 포함하여 12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소설집 <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작가가 선별한 12컷의 스냅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의 얇은 책이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흘려보낸 수없이 많은 '보통의 순간'들을 떠올리고, 그것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했던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잔잔한 슬픔과 그리움 속에 한동안 휩싸인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애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이기도 하다.

 

"가령 슬픔을 통과할 때, 그 슬픔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도 그 사람은 이미 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잃기 위해서는 소유가 필요하고, 적어도 거기에 분명하게 있었다는 의심 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었겠죠. 과거에 있었던 것과, 그 후에도 죽 있어야 하는 것들의 단편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p.210 '작가의 말' 중에서)

 

'자유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작가는 이 책에 실린 한 단편소설에 쓰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홀로 계시던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지만, 어머니를 묻고 나자 이제 자유, 란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을 꿈꾸는 어떤 대상을 가슴에 품고 있는 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관계의 영속성과 영원한 사랑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이별과 그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게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임을 작가는 이 짧고 건조한 이야기들을 통해 주지시킨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더러 있는 법이라고 나는 작가에게 반박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서러운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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