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끝이 뭉툭하게 닳은 연필 한 자루만 손에 쥐어 줘도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잘 써지지 않는 연필심에 침을 발라가며 삐뚤빼뚤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의미도 없는 낙서를 하면서 온종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절. 삶이 흘러가는 방향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자라는 키만큼이나 수북수북 행복이 쌓여가던 시절.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허름한 아지트 하나만 있어도 행복했던 기억을 가득가득 담을 수 있었던 시절. 그러나 세상 모든 것에 깃들던 행복이 어느 순간 한 뼘 사진 속으로 오그라들었고, 행복은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만 보는 눈요깃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나에겐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났던 것일까?

 

행복은 어쩌면 행복에 대한 아무 관념이 없던 어린 시절에나 맛볼 수 있는, 유효기간이 매우 짧은 경험일지도 모른다. '뭔가 관찰하는 행동만으로 관찰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하이젠베르크 원리가 작동하는 순간, 이를테면 성인이 된 당신이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 행복한가?' 하면서 하루에 12번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어린 시절의 흔했던 행복은 그 성질이 변하여 다시는 그런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맛보던 순수했던 행복.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행복의 가짓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의 그라디에이션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 찾는 행복을 잃은 채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식에 대한 걱정과 당부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주저리주저리 엉뚱한 말만 늘어놓다 잘 있으라는 인사말로 끝을 맺는 부모님의 편지처럼 성인이 된 우리는 행복에 대한 욕심과 갈망이 너무 깊고 다양해서 도저히 이룰 수 없고 노력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꿈속의 샹그릴라로 변하게 한 것은 아닌지...

 

기자 출신의 작가 에릭 와이너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행복하다고 인정받는 세계 각국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행복이란 주제를 통찰한 여행 산문집 <행복의 지도>를 완성했으니 말이다. 네덜란드, 스위스, 부탄, 카타르, 아이슬란드, 몰도바, 태국, 영국, 인도, 미국을 돌면서 작가는 '그곳에서 살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처음의 상상을 몸소 실천하고 그에 대한 깨달음과 소회를 책으로 썼다. 그러나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어느 동화 속 이야기처럼 작가 스스로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었나 보다.

 

"네덜란드의 관용은 일상 속에서 정확히 어떤 모습일까? 우선 세 가지가 떠오른다. 마약, 성매매, 자전거 타기. 네덜란드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합법이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미리 조치를 취하기만 한다면, 이 세 가지 모두 쉽사리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탈 때 헬멧을 쓰는 것이 그런 조치다."  (p.41)

 

흔히 행복을 찾는 여행이라고 하면 자신의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내면에서 들끓는 욕심을 인식하고 이를 잠재우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거나,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시기심과 질투 등 행복을 방해하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심리적 처방을 찾아 떠나는 내적 여행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행복에 대한 탐구를 핑계로 공간적 이동을 요하는 여행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작가는 행복이 그 나라만의 자연경관과 문화적 배경에 의해 탄생된 독자적 산물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 탐구를 빌미로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잔혹한 기후와 철저한 고립 앞에서 아이슬란드인들은 절망 때문에 술독에 빠져 사는 삶을 쉽사리 선택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랬다. 하지만 이 바이킹의 강인한 아들딸들은 정오의 하늘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검은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다른 삶을 선택했다. 행복하게 술독에 빠지는 삶. 내가 보기에 그건 현명한 선택이다. 사실 어둠 속에서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p.298)

 

국가가 나서서 국민 행복 총량을 높이는 정책을 펴는 부탄, 국민에게 어지간한 월급쟁이 연봉보다 많은 용돈을 나눠 주는 카타르, 실패가 권장되는 나라 아이슬란드, 지구에서 가장 덜 행복한 나라 몰도바, 모순덩어리의 국가 인도, 유럽의 여러 나라와 저자의 고향인 미국 등을 돌아본 작가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포괄적으로 일반화할 사람은 바보 아니면 철학자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철학자도 아니고 바보도 물론 아닌 작가가 행복의 본질을 밝힐 수는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작가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돈은 중요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돈이 우리 생각대로 기능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중요하다. 친구도 중요하다. 시기심은 해롭다.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그렇다. 바닷가는 선택 사항이다. 신뢰는 그렇지 않다. 감사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감하 더 나아가는 건 종잡을 수 없는 바다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다. 행복은 미꾸라지 같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을 많이 만났다."  (P.521 '에필로그' 중에서)

 

행복에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은 독서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버트란트 러셀의 행복론을 읽기도 하고, 천 근 무게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누군가가 하는 행복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하고, 행복을 위해서라면 반 백 년도 더 된 자신의 습관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렀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행복은 다만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 삶 전체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목적일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마음이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이르는 저마다 다른 거리를 갖고 있는 까닭에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음식을 맛볼지라도 행복의 감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마음이 행복에 이르는 거리는 몇 미터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지금 시속 몇 킬로미터의 속도로 행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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