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마음의 평화라는 게 원한다고 언제든 쉽게 얻어지는 건 아니지만 평화를 깨는 불협화음의 주요 원인이 과거의 기억이라면 우리는 과연 마음의 평화를 위해 자신이 가진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없앨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개인의 기억이라는 게 개인을 대표하는 정체성인 동시에 삶의 총체인 까닭이다. 단지 마음의 평화를 위해 자발적 치매를 얻는 꼴인데 누군들 이 선택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차라리 삶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가와 요코의 초기작 <은밀한 결정>은 사물의 존재와 기억이 주기적으로 사라져가는 미지의 섬을 배경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분위기를 떠올리게도 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쓸쓸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섬에서는 주기적으로 '소멸'이 일어난다. 섬의 주민들은 '소멸'과 함께 관련된 기억을 모두 잃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밀경찰에 끌려가곤 한다. 소설가였던 '나'의 어머니 역시 기억을 잃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이미 소멸한 물건을 지하 서랍장에 숨겨두고서 나에게만 남몰래 보여주거나 어떤 물건인지 설명해주곤 했다. 어느 날 비밀경찰에 불려 갔던 어머니가 시신으로 돌아온 후 들새 연구가였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나'는 가정부 할머니의 남편이자 페리 정비사였던 할아버지와 가족처럼 지내며 살고 있다.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색색깔의 새와 장미정원의 꽃,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 하나둘 소멸해가는 속에서도 '나'는 그와 같은 상실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담담한 생활을 이어간다.
"저도 기억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어머니와 함께 보낸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허사였어요. 도무지 기억이 안 나요. 어머니의 표정이나 목소리, 지하실 공기의 감촉은 선명한데, 서랍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전부 흐릿해져버렸어요. 그 부분만 기억의 윤곽이 녹아버린 것처럼." (p.81)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나'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고 평가해주는 담당 편집자인 R씨 역시 소멸한 것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나'는 할아버지와 합심하여 집안에 작은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를 숨긴다. 언젠가 R씨처럼 기억을 잃지 않은 사람도 숨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비밀경찰의 기억 사냥은 날로 심해져만 가고, 달력이 소멸한 탓에 추운 겨울이 끝없이 이어졌다. 섬에는 식량과 물자가 점점 부족해지고, 소설마저 소멸하면서 '나'는 메울 수 없는 공허감을 느낀다.
"소멸해버린 것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신경의 일부분을 혹사해야 했다. 하지만 조금도 언짢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이야기를 선명한 영상으로 그려내지는 못했지만, 크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어릴 적 지하실에서 어머니와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때처럼 나는 그저 천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마치 신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초콜릿을 하나도 남김없이 받아내려고 치맛자락을 펼친 채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p.294)
소설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하는 지진과 해일은 어쩌면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자연재해, 테러, 전염병 등 예상할 수 없는 위기가 수시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 돌볼 뿐 이웃, 국민, 나아가 지구인의 안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사람들의 관심이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이기심은 증가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동정심 등 인간 본연의 심성은 점차 소멸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인간성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체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설이 소멸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아주 먼 길을 돌아서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지진이 나고, 페리가 가라앉고, 이누이 씨가 맡긴 조각품이 부서지고, 그 안에서 '물건'이 나타나고, 별장에 조각품을 가지러 가고, 검문을 당하고, 할아버지가 죽었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전부 우연에 좌우된 것 같으면서도 확실하게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섬사람들 모두 어렴풋이 예감하면서도 아무도 소리 내어 말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달아나려고 발버둥치지도 않았다. 다들 소멸의 성질을 잘 이해했으며, 가장 적절한 대응법을 알고 있었다." (p.360~p.361)
햇수로 3년째 이어지는 코로나19 팬데믹.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그저 온라인으로만 물을 뿐 만남도, 서로를 향한 토닥임도, 기쁨이나 슬픔의 언어도 점차 그 횟수를 줄여가고 있다. 오직 침묵만이 우리네 삶의 영역을 조금씩 잠식하며 친밀함이 주던 과거의 숱한 경험과 그 기억의 따스한 온기를 잊게 하고 있다. 비대면의 편리가 삶의 절반을 차지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이미 우리들 곁에 자리를 잡은 채 도무지 비켜줄 의사가 없다는 듯 완강한 모습.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밖에는 눈발이 날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