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딸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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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와의 만남은 대개 약간의 심적 충격을 동반한다. 나를 포함한 독자들 대부분은 작가의 솔직함에 놀라고,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대범함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작가이니만큼 그녀에게 있어 솔직함이란 그저 평일에 입는 일상복처럼 스스럼없는 어떤 것이겠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좀 더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하려는 많은 작가들의 글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아니 에르노라는 이름은 다만 하나의 돋을새김으로 기억될 뿐이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 중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은 <단순한 열정>이었다. 작가의 팬이 되기에는 그 한 권의 책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후 나는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등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 '아니 에르노'는 그렇게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사회학적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경험과 판단의 총합으로서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더없이 솔직하게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글로 포착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글이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언제나 죽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열 살 되던 해의 여름 어느 날, 당신은 죽은 채로 내 삶에 들어왔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과 레트의 어린 딸 보니처럼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고 죽은 거지요."  (p.13)

 

아니 에르노의 작품 <다른 딸>은 작가가 태어나기 2년 반 전에 죽은 언니 지네트에 대한 회상이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한 이 글은 작가가 열 살 무렵 죽은 언니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부터 '언제나 죽은 사람'으로 자신과 함께 살았던 언니에 대한 부재와 존재의 탐구, 어머니로부터 사고로 죽은 언니에 대해 들었을 때의 불안과 혼란 등을 작가 특유의 유려하면서도 직설적인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내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1945년 봄에 찍은 내가 나온 사진들에도 그들이 있습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젊음이나 평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씁쓸한 비애만 감돕니다. 얼굴에는 주름이 졌고, 피부도 탄력을 잃었지요. 그녀는 내가 오랫동안 봐왔던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둥글게 말아 위로 틀어 올렸어요. 그들은 피난과 점령과 폭격을 겪었고, 당신의 죽음을 겪었어요. 아이를 잃은 부모인 겁니다. 당신이 거기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그들의 고통으로."  (p.47)

 

열 살의 어느 여름, 우연히 듣게 된 죽은 언니의 존재로 인해 외동딸로 살았던 십 년의 세월이 부정당하고, '나'를 선행한 '당신'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로 인해 '나'는 탄생의 순간부터 '당신'의 그림자가 겹쳐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 '나'는 단순한 딸(One)이 아닌 다른 딸(The other)의 지위로 밀려났음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딸'이 된 '나'는 영영 비교의 대상이 되면서도, 존재하지만 끄트머리에서 탄생하는 대체품의 '나'는 부재하지만 불멸하는 '당신'을 영원히 넘어설 수 없었다.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 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 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내가 그렇게 여기는 까닭은,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엄밀하게 저울질하여 만든 나에 대한 인식을 당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완성할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이에요."  (p.71)

 

작가는 자신이 쓴 편지의 수신자가 '당신'이 아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독자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기를 소망한다. 자신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당신은 글쓰기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형체'이지만 열 살 이후의 모든 삶에서 존재했던 불멸의 실존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가슴에 말할 수 없는 '당신' 한두 사람을 담고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의 시작이 열 살 무렵의 어느 여름 날일 수도 있고, 임종을 며칠 앞둔 어느 겨울 날일 수도 있겠다. 어떤 존재로 인해 자신의 고유성이 훼손되고, 넘어설 수 없었던 높디높은 벽으로만 존재했던 대상.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둠 저편에 존재했던 또 다른 '나'가 아니었을까. 삶이란 '나'를 이기기 위해 끝없이 분투하는 과정이니까. 그리고 끝내 넘을 수 없는 대상 역시 바로 '나'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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