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모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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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의 풋풋한 사랑을 그린 소설은 다른 어느 나라의 작가들보다 일본 작가의 실력이 단연코 앞선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일본 작가가 쓴 비슷한 주제의 소설을 몇 권만 읽어보더라도 나의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들은 그 시기의 아이들이 이성교제에 있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 마치 해부를 하듯 하나하나 세심하게 그려내곤 한다. 물론 소설 전개에 있어서의 이러한 용의주도함이 때로는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세밀한 감정선이 독자들의 보편적 정서와 맞닿는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걸 보면 이것을 마냥 배척하거나 외면할 일도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게 한낱 우연에 불과한 것인 양 하찮게 여길 일도 아니다. 비근한 예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쓴 스미노 요루 역시 청소년기의 사랑을 아주 세밀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았던가.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역시 자수틀 속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청소년기 남녀의 세밀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고등학생 남녀의 흔하디 흔한 일상을 엮어 그 속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특별한 사랑과 우정, 방황, 고민, 불안한 미래 등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진부한 소재와 평범한 배경을 바탕으로 이토록 신선하고 놀라운 서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건 물론 일차적으로 작가의 능력에 기인하겠지만 작위적인 느낌이 폴폴 나는 내러티브를 무한한 감동으로 무마함으로써 그 모든 허물이 용서되거나 지워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고등학교 2학년생인 가미야 도루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후 홀로 된 아버지를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성실한 학생이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이 마냥 한심하게만 여겨지던 어느 날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친구 시모카와를 돕기 위해 과감히 나서게 된다. 시모카와를 괴롭히던 친구들이 가미야에게 했던 제안은 1반의 히노 마오리에게 고백하면 시모카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그의 고백을 히노는 3가지 제안을 걸고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가짜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사귀기 위한 조건이 세 개 있었다. 첫째,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 둘째, 연락은 짧게 할 것. 마지막으로 셋째,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p.96)


"시모카와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더라. 잘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게 훨씬 쉽지 않다고. 그러니까 가미야 넌 남들이 말하는 잘난 사람보다 훨씬 훌륭해.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고생하는데도 비뚤어지지 않았어. 이것도 아버지가 한 말인데, 고생한 사람은 대개 비굴해지거나 성격이 나빠진대. 그런데 넌 다정하거든. 아주 많이. 아주아주 많이." 그 말이 어제 헤어질 때 히노가 한 말과 겹쳤다."  (p.117)


시모카와가 외국으로 떠나고 히노와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가미야의 마음은 온전히 히노에게 쏠린다.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이라고 했던 세 번째 조건은 가미야에게서 점차 희미해져만 갔고, 히노 역시 가미야의 다정한 마음 씀씀이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히노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히노 자신이 사고를 당한 이후 밤에 자고 일어나면, 전날 있었던 일을 전부 잊어버리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것. 히노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수첩과 일기, 스마트폰에 중요한 사항을 메모하며 다음날 그 모든 것을 복습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 그런 히노를 위해 가미야는 매일매일 즐거운 일로 채워주겠다고 다짐한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소중한 시간을 잊어버리다니, 일기에만 남길 수 있다니, 그런 건 싫었다. 그렇지 않나. 인생은 언제나 한 번뿐이다. 어떤 순간도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그걸 소중히 한다. 보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런 걸 기억할 수 없다니 너무한다. 너무 슬프다."  (p.267)


가미야 도루와 히노 마오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곁에서 보살피고 지켜준 사람은 히노의 어릴 적 친구 와타야 이즈미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놀이공원에도 가고, 수족관에도 가고 벚꽃놀이도 가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부모님의 별거로 마음의 문을 닫은 이즈미였지만 히노에게는 각별한 친구였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순간 히노와 도루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고, 아름다운 결말을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또 다른 반전을 위해 두 사람을 투입한다. 자신의 꿈을 위해 어린 남동생과 홀로 된 아버지를 도외시한 채 집을 나갔던 도루의 누나 사나에와 히노의 친구 이즈미였다. 도루의 누나는 결국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아버지와 화해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을 안고 살았던 도루에 대한 감정은 끝내 풀지 못한 채...


"우리 부자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면 두 사람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현실은 픽션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현실은 언제나 이렇게 건조하고 당황스럽다. 주저앉아 꼼짝도 못한다. 그래도 현실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p.243)


사랑은 결국 두 사람이 쌍둥이처럼 닮은 하나의 기억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에 한 사람이 기억을 잃어도 다른 한 사람으로부터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언제든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사랑을 전제로 독자들의 마음을 애틋하게 했다. 청소년기의 사랑이란 것이 대개 불완전함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성장통을 겪으며 온전한 성인으로 거듭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불완전한 사랑을 마지막까지 밀어붙이고야 만다. 매정하리만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즐기고 때로는 괴로워하며, 그것도 모두 평온한 일상 속에서, 밤에 잠이 들면 내일이 찾아온다. 도루가 믿던 것. 그건 지금 같은 마오리의 미래였을 것이다."  (p.369)


짧은 장마가 남긴 화염의 흔적들. 펄펄 끓는 폭염의 기세 속에서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니, 사그라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구촌 곳곳이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초토화가 된 느낌. 그럼에도 우리의 사랑은 이 여름의 더위처럼 뜨겁기만 하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어떤 위협도 당신과 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치조 미사키 역시 자신의 소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에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담지 않았을까. 면면히 흐르는 세월은 시간의 역사가 아닌 차라리 사랑의 역사였음을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이따금 재확인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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