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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뒤 맑음 상.하 + 다이어리 세트 - 전2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7월
평점 :
우리네 삶이라는 게 본디 자신의 시공간을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몸만 겨우 누일 수 있는,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되어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는 허무맹랑한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드는 것이다. 자신에 의해 파괴된 시공간으로 인해 스스로 GG 치고야 마는 어불성설의 과정, 그게 우리네 삶이라는 생각. '두 번의 암 겪어보니 모든 게 덧없더라'라고 했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주말의 오후,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집 떠난 뒤 맑음>을 마저 읽었다.
"여행을 하노라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과거가 된다고 이츠카는 생각한다. 물론 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온갖 일들은 어차피 과거가 되는 것이니, 이상한 감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여기 이렇게 있는 건 현재인데 조금씩 파르께하게 밝아져 가는 겨울 공기도, 하얀 싸구려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도, 이미 반쯤 과거가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츠카 자신이 이 풍경째 미래의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 (하권 p.221~p.222)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14살 레이나와 '예스'보다는 '노'가 더 많은 17살의 사촌 언니 이츠카는 어느 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두 사람만의 여행길에 나선다. 뉴욕에 있는 레이나의 부모와 일본에 있는 이츠카의 부모에게 한 줄의 메모만 남긴 채. 그러나 "가출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거예요."라는 메모만으로는 부모들을 설득하기에도,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안심시키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소설은 레이나와 이츠카의 여정을 따라 전개된다. 그리고 아주 간간이 딸의 가출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두 집안을 조명한다. 레이나의 아빠 우루우는 자신의 일상이 타인에 의해 변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딸인 레오나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벌어진 일상의 모든 변화와 이를 사전에 막지 못한 레오나의 엄마 리오나에 대한 분노가 곳곳에서 표출된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반면 이츠카의 아빠인 신타로는 자신의 딸 이츠카를 여동생인 리오나에게 맡겼지만 가출에 대한 책임을 리오나에게 지우지 않고 오히려 무작정 떠난 이츠카와 레이나의 여행을 응원하는 한편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가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한다. 그런 까닭에 이츠카가 들고 있는 자신의 신용카드에 대한 사용을 정지하지 않는다. 레이나의 아빠 우루우는 신타로의 태도가 영 못마땅하다. 결국 신타로는 카드를 정지하기에 이르는데...
두 아이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난다. 뜨개질을 하는 순진한 남자에게 마음이 기울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어느 할머니의 강아지를 돌봐주기도 하고, 카드가 정지된 후에는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나이를 속인 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히치하이크를 하다가 기사의 변태적 행위를 목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스쳐가는 낯선 곳이지만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눈빛과 따뜻한 온기가 여행을 멈출 수 없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나쳐 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고 문득 깨달았다. 이 장소도,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는 이제 곧 지나쳐 가 버린다. 지나쳐 가 버려서, 아마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과 사물과 장소를, 싫어하게 되기란 어렵다." (하권 p.254)
레이나는 여행 도중에 열다섯 살 생일을 맞는다. 여행을 하면서도 사소한 것들을 기록하기에 바빴던 레이나는 어느 날 '또 일기를 쓰는 거야?'라고 묻는 이츠카에게 '써 두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었다. 그 말에 이츠카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고, 레이나는 그 말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이츠카는 레이나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깜짝 인사를 주선했고, 호텔의 조식실에서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여행 경비를 들고 마지막 여행지를 향해 떠나는데...
"시간의 바깥쪽으로 밀려나 버린 듯한 기분은, '앞으로 한 도시'라고 결정한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가 그곳이고, 그러니 이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하권 p.312)
한낮의 불볕 더위를 뚫고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지금은 바야흐로 성하(盛夏). 인간은 스스로의 경험과 기억의 총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낯선 곳으로의 여행보다 더 크게 개인을 성장시킬 방법은 달리 찾기 어려울 듯 보인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여행은 막혀 있고, 사람들 간의 교류도 원활하지 않은 요즘, 독서가 그나마 막힌 숨통을 틔워주는 듯하다. 동심원으로 퍼지는 물동그라미의 잔상처럼 작가의 생각이 누군가에게로, 바통을 이어받듯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