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
이승희 지음 / 폭스코너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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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말은 감성이 메마르거나 황폐한 가슴으로 변해간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시간적 바쁨보다는 마음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쫓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시작하든지 혹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허겁지겁 시작하든 결과적으로 일을 마무리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별반 차이가 없음에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후자를 선택하곤 한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을 보낼라치면 휑한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관통하는 듯하고,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는 물기를 잃고 바삭바삭 메말라가는 것들이 주검처럼 펼쳐지곤 한다.

 

그러므로 감성이 메마르다는 건 육체의 노쇠보다 더 위험하다고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감성의 메마름은 언어의 고갈로 이어질 때가 많다. 상황에 맞는 적확한 언어의 선택은 감성이 메마르지 않고 적당히 젖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같은 의미의 말을 전달하더라도 다양한 어휘를 선택하는 이와 몇 안 되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이의 감성은 크게 갈린다. 우리의 몸이 70%가 물인 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70%의 감성을 유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로 육체의 질병을 지나치게 걱정하면서도 정신적 질병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보면 식물과의 교감이라는 것도 그렇다. 사소함이 모여 생활을 이루는 것처럼, 조금씩 쓸쓸한 마음이 모여 어딘가에 닿는 간절함이 되는 것처럼, 식물과 나는 아무 말이 없어도 혹은 함께 죽자고 말하지 않았어도 날마다 보내는 사소함이 꽃을 피우고 마음 따뜻해지는 결이 된다. ‘결’이라는 말은 얼룩이나 흔적이 담아낼 수 없는 고요하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온도 같아서 좋다."  (P.45)

 

이승희 시인의 산문집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를 읽으며 내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무척이나 메마르고 거친 시간을 보내왔구나, 하는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용서를 바라는 뜻에서의 반성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의 정신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견 방치한 측면이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반성이다. 그에 대한 치료는 어쩌면 간단할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서 머물면서 자연과 깊이 동화되는 시간을 갖는 것, 내가 알던 식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바람이 흐르는 길목에 나의 마음을 무심히 풀어놓는 것,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을 잊고 패랭이꽃처럼 하늘거리는 것...

 

"굳이 말하지 않고, 묻지 않아도 꽃은 핀다. 중요한 것은 그거이다. 그러나 그냥 둠은 버려둠이 아니라 거기 그냥 둠으로써 끌어안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끌어안음은 굳이 스스로 열렬하다고 소리치지 않아도 깊고 따뜻하다."  (p.204)

 

시인은 자신이 살고 있던 집에서 식물들이 잘 살아남지 못하자, 식물이 살 수 없는 집에서는 살기 싫어 마당이 있는 구옥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전에 살던 집에서 함께 살던 식물들과 함께. 그리고 이사 온 후에 새로운 식구들을 맞아들여 다양한 식물들과 동거동락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함께 사는 식물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라디오를 들려주고, 비가 오면 비를 맞혀주면서 함께 하는 시간들을 늘려가는 것이다. 식물들은 시인에게 호들갑스럽지 않은 위로를 전하고, 슬픔의 모양을 빚어주고, 일상의 평온을 선사하기도 한다.

 

"식물들도 나도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지금 여기가 어딘지를 묻는 일이 있다. 그런 일들이 날마다 쌓여간다. 가끔 농담처럼 구름이 지나고, 혼자 산책하는 나를 내가 뒤에서 따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풍경은 지나가고, 세상의 모든 당신들도 지나가고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이름으로 행복해 보인다."  (p.71)

 

이름도 모르는 식물을 만날 때마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숲길을 걸으면서 무수히 많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을 텐데 여태 이름도 모른다는 건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며, 무시해도 될 만큼 가벼이 여겼다는 뜻이리라. 그만큼 나는 냉정하고 오만한 인간이었으리라. 주변에서 흔하디 흔한 여뀌만 하더라도 바보여뀌, 개여뀌, 기생여뀌, 이삭여뀌 등 그 종류가 어찌나 많던지... 그러나 하나하나의 식물들도 애정을 갖고 바라보면 그들 각각이 얼마나 독특하고 아름다운지 우리는 이름도 모른 채 차마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어느새 미모사의 연분홍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가늘고 긴 수술이 여럿 모여 마치 부채꼴 모양을 한 미모사의 꽃은 고운 색깔과 더불어 부드러운 느낌이 마치 비단결 같다. 매년 나는 자귀나무라고도 불리는 미모사의 개화를 경이로움으로 바라보곤 했었는데 올해는 뭐가 그리 바빴는지 꽃이 만개한 오늘에서야 화려한 자태를 겨우 마주했던 것이다. 자귀나무의 꽃말은 가슴의 두근거림이라는데 나는 땅에 떨어진 부드러운 꽃술을 매만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가만가만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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