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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책임
김신회 지음 / 오티움 / 2021년 3월
평점 :
삶을 지속한다는 건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세월만 보내는 무작위의 삶도 종국에는 책임을 지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나오게 마련이니까. 자신이 원했던 바가 아닐지라도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그리고 시시각각 결과가 도출되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몸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세월에 따라 늙고 병이 드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요, 자식을 낳고 성심을 다해 돌보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것도 결국에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했다. 나를 책임지며 산다는 건 뭘까.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는 건 하나도 없는데 물어볼 데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각자 자기 삶 건사하는 일에 빠듯했기 때문에. 다들 애초부터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빼고." (p.19)
김신회의 에세이 <가벼운 책임>은 세상 그 누구보다 낙천적일 것 같던 김신회 작가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책이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김신회 작가는 꽤나 낙천적이고 대범해 보였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세상 무서운 것도, 걱정스러운 것도 없었다. 겉보기에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지만 독자의 관점에서 작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책의 앞머리에서 자신이 이 년간의 심리 상담을 받았던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동안 읽었던 작가의 저서 두어 권에서 받았던 나의 느낌은 얼음조각처럼 힘없이 부서졌다.
"앞으로도 나는 무수히 많은 선택 앞에서 망설일 것이다. 그러다 관성적으로,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안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 이 년 반 만에 블라인드를 달겠다고 결심한 그날의 마음을 떠올려야지. 그러면 사소한 일도, 제법 큰 일도 심호흡 한번 하고 실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두려움을 잊고, 안 해본 걸 해본 그날의 기억이 가끔 내게 기운을 줄 것 같다." (p.163)
<가벼운 책임>은 작가가 반려견 입양을 결정하고 그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과정에서 겪었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담아낸 책이다. 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달아나기에 바빴던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작가는 이제부터라도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 40대 중반의 나이에 걸맞은 어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유기견 풋콩이를 돌보면서 작가는 비로소 '책임감'이라는 말의 무게보다는 책임지는 삶의 행복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책임감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껍고 행복한 일상을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것은 결코 버겁거나 무거운 일이 아니라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가볍고 마땅한 일이었다.
"마음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면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 결국 혼자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 미덥지 못한 내 감정과 행동을 책임지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책임질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책임감이라는 말의 존재감은 나날이 거대해졌다. 열심히 도망치지 않으면 그 아래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p.193 'epilogue' 중에서)
책임감을 상실하면 나에게 남는 것은 권태와 무기력뿐이다. 책임감 상실의 기저에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책임감 있는 삶을 선택한다는 건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관계에 대한 복원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일상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건 아마도 일상의 소중함이 아닐까. 헐거워진 관계만큼이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우정의 속살이 아깝고, 무료하게 보냈던 맹탕의 시간들이 마냥 덧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일상의 회복이란 단순한 반복을 기꺼운 마음으로 견디겠다는 즐거운 서약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