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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우리들 삶에도 유행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지금 유행하는 옷을 입고 주저 없이 거리에 나서는 것처럼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게 최선인지 평생 고민할 것도 없이 유행하는 삶의 방식대로 순서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있고, 그들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까닭에 인간관계는 언제나 복잡하고, 복잡한 인간관계만큼이나 복잡한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삶에 대한 인간의 고민을 덜어줄 방법은 없는 듯하다. 복잡한 방정식을 풀듯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변수들을 제공하면 자신의 인생에서 부딪치는 여러 고민들도 술술 풀려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 역시 우리보다 앞선 미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보다 과학이 발전한 그 시대에도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고민들은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온라인 학습이 보편화된 까닭에 사회성 교육을 위한 또래들 간의 모임을 고민해야 하고, 일상에서 대화 상대를 찾을 수 없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에이에프(AF: Artificial Friend)의 구매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등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고민을 떠안게 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지만, 삶의 단계에 따라 부딪치게 되는 근본적인 고민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 보인다. 예컨대 대학 진학이나 결혼, 출산, 죽음 등과 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조시는 '향상'(유전자 편집을 통한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증가)을 받은 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병약한 소녀이다. 그런 조시에게 에이에프의 보살핌은 절실했고,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조시를 돌보고 있는 엄마는 에이에프 매장에서 조시가 선택한 클라라를 구매한다. 조시가 매장에 전시되었던 클라라를 본 소감은 특별했다. '정말 귀엽고 똑똑하고, 약간 프랑스 사람처럼 보이고, 머리가 짧고 색이 짙고 옷도 진한 색이고 눈빛이 정말 친절'하다는 게 13살 소녀 조시의 평이었다. 클라라는 그렇게 조시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조시의 집 주변에는 풀이 무성한 벌판과 건초 더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고, 이웃이라고는 '향상'을 받지 않은 또래 친구 릭과 그의 엄마가 사는 집이 유일했다. 그러나 조시의 엄마는 조시가 '향상'을 받지 않은 릭과 어울리는 게 못내 마뜩잖았고, 몸이 아파 출근도 하지 않는 릭의 어머니와도 데면데면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릭이 조시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릭의 어머니 헬렌은 아들이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하여 조시와 대등한 관계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고, 릭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아들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숭고해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누를 정도라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닐 거야.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삶에서 차라리 외로움을 택할 이유는 그것 말고도 많아. 과거에도 그런 선택을 종종 했지. 예를 들면 나는 릭의 아버지와 같이 살기보다 외로움을 택했어. 그 사람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떴어. 릭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만. 그렇긴 해도 그 사람이 한동안은 내 남편이었고 아주 형편없는 남편도 아니었어. 우리가 부유하게 살진 못해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것도 그 사람 덕이지." (p.230)
병약하기는 했지만 온라인 수업도 듣고, 사회성 향상을 위한 또래들의 모임에도 참가하는 등 그럭저럭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조시가 외출은 물론 수업도 듣지 못할 정도로 병이 중해지자 조시의 엄마와 클라라의 시름 역시 깊어진다. 조시의 엄마는 조시의 죽음 이후 클라라를 통한 가상의 조시를 모색하지만 클라라는 자신이 매장의 전시실에 있을 때 목격했던 태양의 능력을 떠올린다. 클라라는 태양의 자양분을 조시에게 쪼이면 자신이 보았던 기적처럼 조시 역시 금방 되살아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매장 쇼윈도에서 보았던 노숙인 거지 아저씨와 그가 안고 있는 개가 죽은 듯 미동도 없었는데, 다음날 해가 강력한 자양분을 그들에게 드리우자 살아나는 모습을 클라라는 내내 기억했던 것이다. 클라라는 전지전능한 태양의 능력에 호소하기 위해 태양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자러 가는 곳으로 짐작되는 맥베인 씨의 헛간에 가보기로 결심한다. 그곳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야만 하는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클라라의 간절한 희망을 알아챈 릭은 클라라와 동행한다. 반면 조시의 엄마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조시를 대신할 대상으로 클라라를 지목하고, 카팔디 씨를 통해 조시의 얼굴을 본뜨고, 클라라에게 조시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배우도록 당부한다. 한편 태양을 기쁘게 함으로써 조시에게 자양분을 쪼여줄 기회를 갖기를 원했던 클라라는 결국 공해를 배출하는 기계를 부술 계획을 세운다. 조시의 아빠 폴은 조시 엄마의 계획에는 반대하지만 클라라의 뜻에는 동조하여 클라라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물론 인간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한계가 있을 거예요. 폴 씨가 시적인 의미로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배워야 할 것에는 끝이 있을 겁니다. 조시의 마음은 방 안에 또 방이 있는 이상한 집을 닮았을 수 있지요. 하지만 이게 조시를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저는 최선을 다하겠어요. 제가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p.322)
소설에서는 줄곧 자신의 주인이자 친구인 조시를 향한 '에이에프 소녀' 클라라의 헌신적인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클라라가 보여주는 사랑과 인간 못지않은 현명한 판단은 로봇이 과연 인간의 마음을 어디까지 학습할 수 있으며, 판단을 유도하는 인간의 자의식을 로봇도 공유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물론 소설을 읽는 독자는 클라라가 야적장에 버려지기 전까지 로봇이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학습능력이 뛰어났던 클라라에 대한 연민과 가슴 절절한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렵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 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p.442)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에이에프 소녀' 클라라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사랑은 얼마나 위대하며, 그것이 비록 생명이 없는 로봇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전율을 주는가? 하고 말이다. 세밀한 필체로 사소한 장면까지 눈에 보이는 듯 묘사함으로써 SF라는 가상적 현실에 사실감을 더한 <클라라와 태양>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고유한 무엇인가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묻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