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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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쓰면 못 쓸 것도 없겠지만 자신의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건 어쩐지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살아오면서 남들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경험도 없으려니와 딱히 그럴 필요성도 없이 살아온 터라 지난 과거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불편하고 속이 거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그렇다고 뭐 깊숙이 숨겨야 할 은밀한 이야기가 나의 과거에 다수 내포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백은선 시인 역시 이런 비슷한 심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나' 혹은 '내가'라는 말을 안 하고 싶다. 이미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이다. 근데 자꾸 그러면 어떻게 하지? 글이 공개된다고 생각하니 겁난다. 근데 원고료를 주니까 열심히 좋은 말을 해서 사람들을 막 재미있게 만들고 싶은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잘 안 되려고 한다. 저는 여기까진가봐요."  (p.18)


시인이 쓴 산문집은 언제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산문이지만 문장에 리듬이 실려 글을 읽는 독자들의 독서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인은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시작하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숨기지 못하는 습성이 있지 않은가. 속이 훤히 비치도록 다 드러내놓고 까발리지 않으면 글이 아니라고 믿는 족속, 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더 내놓을 게 없나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족속이 시인이 아니던가. 하여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 독자들이야 한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테지만 정작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 조리고 콩닥콩닥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겠는가.


"내가 너무 화가 많다. 정말 미칠 것 같았나보다. 감정을 그대로 뭉쳐서 종이 위에 패대기쳐놓은 걸 보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걱정스럽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게 너무 많고,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진다. 정신 차려. 잘 좀 하자."  (p.172)


'왕따'로 유소년기를 보냈다는 시인은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눈치뿐이고 잃은 건 자존심이라고 말한다. 사업에 실패한 후 티브이 앞에 반쯤 송장처럼 누워지내는 아빠와 한방에서 지내는 게 숨이 막혔고, 별 이유도 없이 얻어맞기 일쑤였다고 고백한다. 티브이 화면이 바뀔 때마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천장에 어른거리는 빛을 보며 나중에 크면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소중한 목표를 세웠다는 시인. '남자에게 여자는 변기'라는 말 따위를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성평등에 무지했다는 고백과 이혼 후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지만 주민센터에서 '한부모 가정' 대상자로 지정받지 못했다는 고백과 딸의 몫으로 나온 재난지원금이 아빠에게 지급됐다는 황당한 사연 등을 시시콜콜 쓰고 있는 시인의 키워드는 '말'과 '시'와 '삶'과 '여성'이라는 각 부의 제목과도 맞닿아 있다.


"밤중에 침대에 누우면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집은 이십 층이야. 언제든지 뛰어내리면 반드시 죽을 수 있어. 그럼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러다 아이를 본다. 아이의 잠든 얼굴은 천사 같다. 이상한 충만함과 슬픔이 마음 안에 가득 차오른다. 네가 겪을 여러 처음들로 인해 상처받고 아무 손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내가 옆에 있으려면 나는 더 오래 살아야겠다. 더 오래 살아야만 한다."  (p.176)


시인이 쓴 곱디 고운 산문집을 기대하며 읽었던 백은선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는 독자인 나의 가슴에 다가와 시인은 이상한 사람이었다가, 가여운 여인이었다가, 당당한 엄마이자 마음 따뜻한 누군가의 딸이기도 했고,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건전한 사회 구성원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내가 다시 붙인 책의 제목은 <나는 시인이 이상하고 가엾고 건전하고>쯤으로 순치되지 않을까.


"옷을 벗고 있으면 이상하고 불편한 것처럼 마스크를 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진 모습이 어쩐지 짠하다. 공기 좋고 바이러스 없는 곳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내 유년과 아이의 유년이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p.249)


주춤하던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다시 또 강해지는 양상이다.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바이러스와 함께 했던 시간도 1년여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2021년도 코로나19를 떨쳐버리는 건 요원한 일인 듯싶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며 살면 될 일이지만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다. 바이러스에 일부러 감염되는 사람이야 있으랴마는 확진자들에 대한 괜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외출을 삼간 채 수도승처럼 사는 내가 바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일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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