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이 남는다
나태주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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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아도 후둑후둑 나른한 빗소리가 실제인 양 들리는 건 내가 지금 시집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일 년에 두어 번 마치 연중행사처럼 시집을 읽다 보니 나의 기억은 이빨 빠진 톱니처럼 기우뚱기우뚱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가 많다. 시인의 이름과 그가 쓴 대표 작품을 연결 짓는 것도 어렵고, 어떤 시인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시인의 성 정체성마저 가물가물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라치면 나는 애먼 세월 탓을 하며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한 구절의 시가 쿵 하고 가슴을 칠 때면 화들짝 놀란 선잠이 멀찌기 달아난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사랑만이 남는다>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온갖 사랑의 언어들이 가득하다. '의심하지 말아라/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사랑의 향연은 '너로 하여/세상이 초록빛으로 변했다면/아마 너는 나를/거짓말쟁이라 할 것이다'로 부풀려지고, 마침내 '세상에 와서/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가장 좋은 표정을/너에게 보이고 싶다//이것이 내가 너를/사랑하는 진정한 이유/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시인이 쌓아 올린 단 하나의 사랑탑 주변을 서성이며 내가 소망하는 나만의 사랑을 각색한다.

 

"누군가, 나보다 나이 젊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묻는다면 첫째도 사랑이고 둘째도 사랑이고 셋째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랑하지 못해서 우울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슬프고, 사랑하지 못해서 불안하고, 끝내 사랑하지 못해서 불행했던 거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p.4 '시인의 말' 중에서)

 

'숭고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백목련은 오직 북쪽을 향해 핀다고 해서 북향화로 불린다고 한다. 나는 목련이 만개한 이 계절에 한 송이 숭고한 사랑을 눈 속에 간직한다. 어느 날 그 사랑은 지면을 향해 '툭' 하고 무겁게 떨어지겠지만 삶도, 사랑도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저 목련이 봄이 오는 이 짧은 계절에 최선을 다해 피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1부 '남몰래 혼자 부르고 싶은 이름', 2부 '당신 있음이 그냥 행복이다', 3부 '너를 생각하면 가슴속에 새싹이 돋아나'로 구성된 이 시집은 책에 실린 130여 편의 시로 인해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이 꽃처럼 벙근다.

 

봄비

 

 

사랑이 찾아올 때는

엎드려 울고

 

 

사랑이 떠나갈 때는

선 채로 울자

 

 

그리하여 너도 씨앗이 되고

나도 씨앗이 되자

 

 

끝내는 우리가 울울창창

서로의 그늘이 되자.

 

라일락 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봄비가 예보된 주말을 지나면 기억 속의 향기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언젠가 기억 속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되겠지만 시인이 노래했듯 '서로의 그늘이 되'기 위해 지금은 나의 최선을 다해야 할 때. 공원에 산책을 나온 어느 모녀의 달착지근한 밀어가 바람결에 라일락 꽃잎처럼 실려 와 향기를 더하는 오후,  나태주 시인의 시집 <사랑만이 남는다>를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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