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는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전업 작가로서의 소설가는 남들보다 글을 잘 쓰는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고 있는 게 확실하지만 그밖에 이를테면 예지력과 같은 비범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가가 타인의 운명을 족집게처럼 알아맞힌다는 건 물론 아니다. 소설가가 운명을 예지하는 대상은 타인이 아닌 그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예지의 방향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점에서 점쟁이와 구별되는 것이다. 용한 점쟁이가 타인의 운명을 알아맞히는 것처럼 소설가는 어떤 나이가 되면 자신이 써야 할 소설의 방향이나 내용을 어렴풋이 감지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조정래 작가가 춘향전과 같은 로맨스 소설을 써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1964년생인 에쿠니 가오리가 40대 중반에 출간한 소설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역시 에쿠니 가오리라면 그 시기에 마땅히 그와 같은 내용의 소설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그런 소설들로 묶여 있다. 40대를 넘기면 그 시절의 감성이나 추억을 영원히 기억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20대와 30대의 젊은 시절에는 작가 주변의 또래 친구들 혹은 작가 자신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할 만한 소재는 무궁무진 넘쳐났을 테고, 웬만한 사랑 이야기로도 소설 한 편은 너끈히 쓸 수 있었겠지만 상대적으로 관계의 폭이 좁아지기 시작하는 40대를 기점으로 소재는 빈궁해지고, 부족한 소재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어렴풋한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에쿠니 가오리의 새 단편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를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온갖 감정이 교차했던 여고 시절의 교실은 이미 내게서 멀어졌는데, 거슬러 올라가 더듬어 보면 분명 거기에 있다. 동성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에 몸을 떠는 기쿠코처럼, 현실을 버티지 못해 정신에 금이 간 에미처럼, 우정과 연애의 경계에서 덜 영근 사랑을 하는 유즈처럼, 비만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일기장에 독약을 처방하는 카나처럼, 빨리 성숙한 육체로 남자를 혼란케 하는 미요처럼 많은 친구들이 그 의미조차 규정할 수 없는 감정과 경험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나 역시 그랬다."  (p181~p.182 '역자 후기' 중에서)

 

소설을 번역했던 김난주 역시 당시의 자신이 낯설고 멋쩍다고 말한다. 질서정연하지 않고 안정감이 없는 것이 오히려 버겁게 느껴지는 탓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 시절의 감성 충만하고 끈적끈적한 나날들을 단문 위주의 건조한 문체를 통해 작가 자신의 감정이 배제된 듯한 사실적인 기록으로 소설을 이끌어간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자신의 경험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데면데면한 관계를 지속한다.

 

"이모는 외할머니 집 근처에 혼자 살고 있다. 장소는 에코다. 독신 생활이 자유롭고 편하기는 한데,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가출할 수 없다는 것. "그렇잖아, 내가 가출을 해봐, 그건 절대 가출일 수 없잖아. 돌아오면 여행인 거고, 돌아오지 않으면 이사잖아." 이모는 가능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p.162 '비, 오이, 녹차' 중에서)

 

책에는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전절에서 중년의 동성 여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로 쓴 '손가락', 단짝이었던 친구가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병들어 가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실상을 그린 '초록 고양이', 숫기 없는 남자 친구 요시다가 만남을 이어가면서 점차 애인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게 된다는 내용의 '천국의 맛', 비만에 대한 피해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일기장에 독약을 처방하는 카나의 일상을 그린 '사탕일기', 독신인 이모를 성숙한 어른처럼 챙기는 유코의 이야기를 다룬 '비, 오이, 녹차', 성숙한 몸으로 육체적인 사랑만 추구하는 미요의 이야기를 그린 '머리빗과 사인펜'이 그것이다.

 

"결국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굴함과 오만함이 뒤섞인 웃음과 땀에 젖은 싸늘하고 따스한 몸을 떠올릴 때마다, 라면 한 그릇으로 꽤나 행복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야 할지 라면 한 그릇 때문에 호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 곤혹스럽다. "아저씨." 아직도 미요의 달짝지근한 속삭임이 귓가에 남아 있다."  (P.179 '머리빗과 사인펜' 중에서)

 

잰걸음의 겨울 해가 서둘러 하루를 마감하려 하고 있다. 고교 시절의 흐릿한 기억들이 석양빛에 걸려 아스라하다. 하루의 시간들이 어둠 저편으로 스러지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도 언젠가 사라지겠지. 돌이켜보면 너무나 짧았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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