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매년 연초에는 희박하던 행복이 갑자기 넘쳐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다들 너무 많이 소유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해 안달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평소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던 행복이 매년 연초만 되면 '세계행복은행'(물론 존재하지 않는 기구이다)의 총재가 '에이, 기분이다. 양적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행복을 한 100억 장쯤 찍어내자.'라고 결심이라도 했는지 행복은 그저 흔해빠진 어떤 것으로 변하고 만다. '아이들도 노인들도 행복을 만들어 거리마다 크게 외치네. 해피니스~ 해피니스~' 뭐 이런 노래가 금세라도 울려 퍼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흔한 인사이긴 하지만 나도 물론 '행복 가득한 2021년'을 맞으라는 인사를 곳곳에 뿌렸었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깨끗한 팬츠가 쌓여 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확고한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쩌면 나 혼자만의 특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혼자 살고 있는 독신자를 빼놓고는, 자신의 팬츠를 자기 손으로 직접 고르는 남자는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그다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p.341~p.342 '작지만 확고한 행복'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는 꽤나 오래된 책이지만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문학사상사에서 199년에 초판을 발행하였으니 20년도 더 지난, 마치 낡은 책만 취급하는 헌책방의 한 귀퉁이에서나 발견될 듯한 골동품쯤으로 연상되기도 하겠지만 막상 책을 펼쳐 내용을 읽어본 독자라면 왜 사람들이 하루키, 하루키'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쯤 이해할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만 하더라도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루키가 쓴 이 책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대부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생활 주변과 삶에 대해 소박하고 경쾌하게 풀어가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예컨대 옛날부터 쌍둥이에게 관심이 많아서 쌍둥이 아가씨와 데이트를 해보는 게 오랫동안의 꿈'이었다거나, 한국에서 개를 잡아먹는 관습이 있는데 이건 성향으로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개념의 문제는 아니라거나,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은 의미라거나 하는 등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넓고도 다양하다 하겠다.

 

"결혼하고 2년째쯤 되었을 때의 일인데, 나는 반년 정도 '주부(主夫=하우스 허즈번드)' 노릇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렇다 할 일도 없이 극히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반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페이지였던 것 같다."  (p.105 '나의 주부(主夫) 생활' 중에서)

 

나는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이면 비교적 가벼운 내용의 책을 읽곤 한다. 바쁘고 어수선한 시간을 보내는 까닭에 이해하기 어렵거나 딱딱한 책은 읽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읽는다고 하더라도 남는 게 없겠지만 말이다. 1월을 뜻하는 재뉴어리의 어원이 야누스에서 왔다고 하지만 1월은 사실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야누스처럼 지난해를 되돌아보며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는 옛 얼굴과 미래를 설계하는 새 얼굴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말이다. 괴테는 자신의 책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썼는데 나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방황하는 걸 보면 그저 봄을 타는 것처럼 '1월을 타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단순히 정의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동장군의 위세 무섭기만 하다. 1월의 첫 주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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