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 -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기 위하여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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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올리버의 에세이 <긴 호흡>은 어린이들의 장난감 레고와 같은 책이다. 주어진 형식이나 주제는 없고 책을 읽는 독자에 의해 어떠한 형식, 어떠한 주제로 언제든 변경 가능하기 때문이며, 얇디얇은 이 책을 가지고 몇 날 며칠이고 뒹굴뒹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는 문장과 문장 사이, 단락과 단락 사이에 너른 공간을 만들어 놓고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껏 사유하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부추기는, 어쩌면 작가는 사유의 세계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레크리에이션 강사와 같은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쓰는 건 개를 목욕시키는 일과도 같았다. 다듬을 때마다 조금씩 깔끔해졌다. 하지만 개를 목욕시키다 보면 개가 너무 깨끗해져서 개다움을 완전히 잃을 위험에 처할 때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책도 너무 많이 씻어내게 될까 봐 수건을 내려놓고 책에게 다 끝났다고 말한다. 왕겨나 모래 같은 실제 세계의 쪼가리들이 이 책의 페이지들에 조금은 달라붙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p.8 '서문' 중에서)

 

1935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메리 올리버는 월트 휘트먼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내면의 독백, 고독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측면에서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미국 시인 맥신 쿠민은 메리 올리버를 일컬어 '습지 관찰자'이며 '자연 세계에 대한 포기할 줄 모르는 안내자'라고 했다. 2019년 1월 17일, 여든세 살의 일기를 마칠 때까지 스무 권이 넘는 시집과 산문집을 냈던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경이와 기쁨을 단순하고 빛나는 언어로 노래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따금 나는 몸을 기울여 물을 들여다본다. 연못 물은 거칠고 정직한 거울이다. 내 시선뿐 아니라 사방에서 물그림자에 합쳐 드는 세상의 후광도 비춘다. 그러니까 연못을 가로질러 날아다니며 노래를 조금 부르는 제비들은 내 어깨 위로, 머리칼 사이로 날아다니는 것이다. 진흙 바닥을 천천히 지나가는 거북은 내 광대뼈를 만지는 것이다. 내가 이 순간 똑딱거리는 시계의 소리를 듣는다면 그 소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p.83)

 

시인은 이 책에서 인간 또한 자연계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이 살았던 프로빈스랜즈의 무성한 숲과 모래언덕에서, 클랩스 연못에서, 베넷 연못에서, 라운드 연못에서, 오크 헤드 연못에서, 패스처 연못에서 시인과 함께 살았던 부엉이와, 올빼미와, 토끼와, 들쥐들과, 어스름한 마당에 앉아 평화로운 생각에 잠긴 고양이로부터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이 든 배낭을 메고 학교 대신 숲으로 들어갈 때마다 책들 사이에 늘 함께 있었던 휘트먼의 시집으로부터 배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가 단지 존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말하기 위해, 동무가 되기 위해 쓰인다는 걸 배웠다. 모든 것이 필요할 때 시는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나는 숲으로 들어가는 헝클어진 미묘한 길과 배낭 속 책들의 무게를 기억한다. 나는 그 어슬렁거림과 빈둥거림을 기억한다. 휘트먼과 함께 "바지 끝을 장화 속에 집어넣고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나 자신의 노래> 중에서) 경이로운 날들을 기억한다."  (p.92)

 

우리는 이따금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시의 무용론을 말하기도 하고, 압축된 시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를 멀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못 위에 부서지던 금빛 햇살의 잔상들을 실재하는 시구 하나하나의 시어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모습으로 목도하는 비현실적인 체험으로 경험하기도 하고, 현실에서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엄마의 체온을 하나의 시구에서 체험하기도 한다.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시가 의미하는 바가 뭔지 몰라서 시를 읽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핑계일 뿐이다.  시는 시어 위에 실재하는 햇살이며, 엄마의 따스한 체온이며, 나풀거리는 눈발일 뿐이다. 시는 이해하는 문학이 아니라 체험하는 문학인 까닭에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시인의 삶을 체험하면 그만이다. 내가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을 읽으며 프로빈스랜즈의 숲길을 길게 거닐었던 것처럼. 때로는 어슬렁거리며, 때로는 또 빈둥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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