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조막만 한 햇살이 자맥질하듯 어른거렸다. 하늘에 구름이 많은 탓이었다. 가뜩이나 감질나는 겨울 햇살이 날름거리며 드나드는 사무실 한 귀퉁이에 서서 눈 덮인 풍경을 내다보았다. 스산한 느낌이었다. 완전무장을 하듯 꽁꽁 싸맨 사람들은 뒤뚱거리며 거리를 스쳐갔고,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은 채 녹지 않은 눈을 뒤집어쓴 채 마치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나란했다. 뚝 떨어진 기온 탓에 모든 사물이 금방이라도 일순 정지할 것만 같은 풍경. 2020년을 하루 남긴 얼떨떨한 오후.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었던 건 시간이 꽤나 지난 일이지만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짧게라도 남겨야 하나?'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일단 의문을 갖는다는 건 대개 '귀차니즘'의 발로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를 쓸 때마다 번번이 느꼈던 막연함 혹은 뭔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괜스레 붓방아만 찧게 되는 막막함 같은 것들로 인해 리뷰는커녕 시간만 축냈던 것에 대한 일말의 회의 혹은 안타까움이 내면에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맞다. 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p.298)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과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통해 국내에서도 이미 탄탄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김애란 작가이기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한다는 건 쉽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작가의 성장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1부 나를 부른 이름'을 비롯하여 작가 주변의 동료 문인들과 작가가 읽은 책들에 대해 쓴 '2부 너와 부른 이름들', 그리고 문학 관련 글과 작가가 경험했던 여행과 우리 사회의 사건들에 대한 작가의 느낌을 기록한 '3부 우릴 부른 이름들'로 책은 완성된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얇은 포스트잇의 찰나가 쌓여 두께와 무게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p.252)

 

작가는 작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작가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특유의 섬세하고 다정한 문체로 들려준다. 작가가 말했듯 '잊기 좋은 이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되짚어 불러주었을 때, 자신의 삶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우리가 불렀던 이름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2020년의 겨울, 가만가만 불러보는 이 계절의 이름이 내 삶의 한 구석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얼어붙었던 그대의 이름도 내 따스한 입김으로 부디 되살아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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