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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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추억이란 기억이라는 질료에 개개인의 감정을 적당히 섞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의 기억에 그때그때의 감정 - 기쁘다거나 슬프다거나 행복하다거나 짜증난다거나 하는 - 을 적당히 섞어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행위가 추억인 것이다. 요즘처럼 코로나19와 길어진 장마로 인해 실내 생활이 한정없이 늘어난 시기에 우리는 자신의 오래전 기억에 기쁨 두 방울 놀람 한 방울을 더해 새로운 추억을 빚어본다거나 모든 기억에 그리움 한 컵을 마구잡이로 들이부어 흔하디흔한 추억들을 전리품처럼 늘어놓으며 답답한 시간을 달래게 되는 것이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역시 주인공인 심시선 여사에 대한 추억과 심시선 여사로부터 비롯된 한 가정의 역사가 담담히 그려지고 있다. 20세기의 폭력적인 시대를 살았던 그녀가 시대에 맞서 약한 이들에게 공감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있어서는 과격할 정도로 진보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여장부의 기질을 보여주었던 심시선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가족들은 그녀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하와이에서 단 한 번뿐인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p.83)

 

소설은 줄곧 심시선 여사의 글과 강연, TV 토론 등을 한 꼭지로 하여 심시선 여사와 관련된 가족들의 추억과 개별적인 삶의 편린들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고 새로운 삶을 찾아 대한민국을 떠났던 심시선은 자신이 체류하던 하와이에서 미술계의 거장이었던 마티아스 마우어를 우연히 만났고, 교육과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그의 말에 혹해서 하와이를 등지고 독일로 향했다. 자신의 명성과 재능을 통해 심시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이용하려 했던 마우어로부터 탈출하여 요제프 리와 결혼하여 귀국했던 심시선 여사는 큰딸 명혜, 둘째 딸 명은, 셋째인 아들 명준을 낳았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던 요제프 리는 결국 독일로 돌아가고 만다. 요제프 리와 이혼한 심시선은 광고계의 대부였던 홍낙환과 재혼한다. 그리고 홍낙환의 전처 소생이었던 홍경아를 가족으로 맞이한다.

 

파란만장했던 심시선의 세대를 기점으로 명혜, 명은, 명준, 경아의 2세대를 거쳐 심시선의 손녀인 화수, 지수, 우윤, 그리고 홍경아의 아들 정규림과 딸인 정해림으로 소설은 확장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뜸했던 시대에 여류화가이자 작가로 살았던 심시선 여사를 통해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은 특별했던 그녀의 10주기 제사를 계기로 알게 모르게 물려받은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떠올리며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장애와 고통을 심시선 여사의 시선으로 재조명하게 된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31)

 

오랜만에 드러났던 맑은 하늘과 뜨거웠던 햇살, 투명한 시간의 속살 너머 말매미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던 하루가 뒤뚱뒤뚱 저물고 있다. 먼지처럼 쌓여만 가는 기억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주인공인 심시선 여사로부터 라는 의미와 함께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저마다의 시선, 저마다의 관점, 저마다의 세계관에 의해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철학적 견해가 반영되었던 게 아닐까.

 

몇 대에 걸친 한 집안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박경리 여사를 떠올리곤 한다. 소설 <토지>에서, <김약국의 딸들>에서 면면히 이어지던 끈끈한 생명력이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지나 후세의 다른 어느 작가에게로 끝없이 넘실댈 것만 같은 느낌. 일상을 다룬 여러 편의 에세이를 모아 한 편의 소설로 완성한 듯한 느낌의 <시선으로부터>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떠오르게도 하고, 소설을 읽는 틈틈이 바삭바삭한 기억들이 더위를 잊게 했던 오늘, 바야흐로 지금은 성하(盛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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