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 - 남인숙의 여자마음
남인숙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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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외여행에 매료되는 이유는 여행지의 이국적인 풍경이나 문화보다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익명성으로부터 오는 자유가 아닐까 싶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랄까? 우리는 수많은 현지인과 관광객들 사이에서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인지 유창하지 못한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어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그들의 표정과 이따금 들리는 몇몇 단어들을 조합하여 그들의 속내를 파악하고자 애쓰기도 한다. 그리고 모국에서는 결코 표현하지 않던 공감 그 이상의 연민을 그들에게 보여주곤 한다. 그들 역시 외롭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이와 같은 공감이나 연민은 4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저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구나, 실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로부터 주인공의 자리를 더는 차지할 수 없다는 열패감인 동시에 삶의 정점에서 서서히 내려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의 또 다른 행복을 맛보게도 된다. 그런 면에서 40대 이후의 행복은 환경의 변화에서 온다기보다 자기 스스로의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은 그저 삶이라는 방의 창을 여는 일이다. 창을 열어도 방 안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새 공기로 숨 쉬는 내 호흡이 나도 모르게 달라진다. 나이 들수록 여행에서 얻는 게 많아진다. 아마 스무 살 때 보았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느끼고 배운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에 비해 육체가 점점 여행에서 부적합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참 소름끼치게 인생은 공평하다." (p.37)

 

남인숙 작가의 수필집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는 도발적인 제목에 비해 그 내용은 솔직하고 담백하여 오히려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철없는 남편에 대한 비난의 글들이 줄줄이 등장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젊음을 잃어가는 대가로 얻고 있는 좋은 것들을 숨은 그림찾기 하듯 하나하나 찾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조증 환자처럼 신이 났다고 말하는 작가는 '누구나 '좋은 시절'이라고 말하는 청년 시절에만 삶의 절정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무지와 어리석음과 혼돈으로 후회할 짓만 하고 돌아다니던 내 젊은 시절을 돌이키기도 지긋지긋하다. 나이 들어가는 지금이 더 좋고,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책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삐딱한 시선에 대한 강한 반론인 동시에 '지금 불행한 사람들이 불행한 핑계로 나이듦을 선택한 것뿐'이라는 작가 자신의 확신에 찬 결론이기도 하다.

 

"아이나 남편과의 사이에서 뭔가가 삐걱거릴 때 멀리 떨어져 살펴보면, 거기에는 항상 내 자신이 아닌 그들을 통해 행복감이나 대리만족 따위를 느껴보려고 하는 내가 있었다. 행복의 중심축이 내가 아닐 때 서로가 불행해지더란 말이다. 자꾸만 희생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는 건 씁쓸한 역설이다. 어머니들의 전매특허인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로 시작되는 각종 슬픔의 대서사시가 그 증거다." (p.246)

 

'살면서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후회되는 일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작가는 후회없이 인생을 사는 비기가 '후회하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후회하지 않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잘해보지 뭐.' 하는 맘으로 대략 그런 식으로 살다 보니 일은 돌고 돌아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이 좋은 선택을 한 모양새가 되어가더라는 이야기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백 살이 되어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건 가능하다. 후회하지 않고 내가 저질러놓은 일들에 대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게 후회없는 삶을 사는 비법일 것이다." (p.98)

 

이 책은 어쩌면 자존감이라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중년의 '아줌마'들을 위한 자존감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인 책처럼 읽힌다. 물론 작가 자신도 그 중 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면 당당하고 행복하게, 삶에 대한 후회나 미련을 두지 않고 남은 생을 잘 살 수 있을까 끝없이 탐구하고 틈만 나면 궁리하는 어느 소설가의 최종 결론이자 중년 여성의 행복한 삶을 위한 남인숙 작가의 처방전인 셈이다.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까닭에 책은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비틀즈의 노래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di Oblada)'가 문득 떠오른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Life goes on)이라는 뜻을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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