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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비릿한 밤꽃 냄새가 온 산에 퍼지기 시작하면 여름이다. 며칠 전부터 밤꽃 냄새가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만 키가 큰 밤나무 우듬지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인 듯 밤꽃이 만개했다. 산을 내려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선풍기를 켠 아침, 낮게 드리운 구름이 우울을 가장한 채 몇 조각의 슬픈 감정을 던져준다. 휴일이라는 이유로 한껏 느슨해진 마음의 밀도. 그 성긴 틈새를 따라 빗물처럼 슬픈 감정이 흐른다. '뭐라도 해야지'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이럴 때 몸과 마음은 갈라선 연인처럼 서로에게 한없이 무감하다. 나는 결국 커피를 끓인다. 카페인의 힘을 빌려서라도 오늘 내로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고 누군가의 얼굴은 흐릿하게 지워짐으로써 더 정확히 지시할 수 있다. 영화 <윤희에게>(임대형, 2019)에서 달의 형태가 여러 번 바뀐 뒤에야 보름달이 되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영화에서 그 만월까지의 시간은 아픈 윤희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 된다." (p.188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후다다닥 잰걸음으로만 달리던 시간들이 불현듯 터벅터벅 느린 발걸음으로 속도를 늦춘 듯한 휴일이면 나른한 피로가 몸의 이곳저곳을 찌른다. 마치 검진을 하듯 이곳저곳을 찔러본다. 무턱대고. 통제할 수 없는 시간들이 들쭉날쭉한 감정의 골을 따라, 무심한 시간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내 감정을 무시한 채 폭군처럼 빠르게 흘러갈 때, 나는 차마 숨죽인 채 뒤처지는 나를 그리고 어쩌면 너를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었기에 틈만 나면 책을 펼쳤고, 그렇게 한 줄 기억도 되지 않는 독서를 이어갔고, 읽었던 책들 중에 그나마 약간의 기억이라도 남아 기어코 나를 붙잡는 책이 있다면 리뷰를 써야겠다고, 오늘 내로 꼭 써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해럴드 래미스, 1993)에는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야 하는 비운의 남자 필이 등장한다. 반복의 운명은 필에게 금고털이, 뭇 여성들과의 데이트 같은 일탈의 자유를 선사하지만 오늘 무슨 일을 겪었든 내일이 되면 다시 리셋되고 마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필은 절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다. 그 숨막히는 반복의 하루, 똑같은 뉴스, 똑같은 표정과 행동의 사람들, 똑같은 날씨, 똑같은 대화 속에서 필은 죽음으로라도 이 상황에 변형을 가하고 싶은 절박함을 느끼는 것이다. 달라지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가." (p.209 '또다시라는 미래' 중에서)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김금희 작가가 데뷔 11년 만에 펴낸 그녀의 첫 번째 산문집이라고 했다. 데뷔 직후 발표한 글부터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글들 중 42편을 뽑아 묶은 이 책에는 대학시절 이야기나 친구와의 일화, 엄마를 잃은 엄마에 대한 관찰과 할머니에 대한 회상, 출판 노동자 시절 이야기, 혼밥에 대한 생각 등 작가의 성향이나 진솔한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빼곡하다.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p.5 '서문' 중에서)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퍼지는 일'이라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의 안부만 겨우 확인한 채 무심히 또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 시간은 우리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은 채 사정없이 흘러만 가는데, 우리는 또 그에 따라 나이가 들고, 누군가는 늙어가고, 또 누군가는 죽어가고...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으나 중력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암흑물질처럼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많은 시간들. 허투루 보냈던 시간 밖의 모든 시간들에 삼가 조의를 표하게 되는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