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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ㅣ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평점 :
어떤 소설가는 너무 유명해서 그의 작품이 오히려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하자면 작가의 명성으로 인해 작품이 역차별을 받는 셈인데 그것은 어쩌면 독자들의 기대심리 탓인지도 모른다. 유명세를 타는 작가의 작품에는 여타의 작가와 구별되는 뭔가 다른 점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잔뜩 품고 책을 집어 든 독자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실망만 커지게 마련이고 급기야 다 읽지도 않은 책이 책장에 꽂힌 채 먼지만 쌓이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고전의 범주에 드는 책들이 대체로 그런 신세를 면키 어려운 까닭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가 그렇고, 프루스트가 그러하며, 장 그르니에나 보르헤스가 그럴지도...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그와 같은 측면이 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오히려 평범하다는 이유로 폄훼되거나 가치 절하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번역본이 아닌 영어 원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의 진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거나 작품 속에 숨겨진 매력을 재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기자로 근무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전쟁과 같은 참혹한 현장을 누볐던 여러 경험들이 쌓여 작가 내면에 공고하게 다져진 인생철학이 작품 속에서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비로소 깨우치게 된다.
"머리 없이 몸뚱이뿐인 시신을 경찰이 무언가로 가려 덮는다. 가스관을 고칠 배관공을 부르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한다. 호텔 직원이 빨간 눈을 하고 복도 대리석 바닥의 핏자국을 지우고 있다. 죽은 사람은 나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다. 엊그제는 과달라하에서 긴 하루를 보냈고, 어제는 상당히 추운 밤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아침 배가 고플 뿐이다." (p.142)
논객이지 저널리스트였던 샤를 페기는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라고 썼다. 진실을 말한다는 건 어쩌면 저널리스트의 사명이자 행동강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진실은 상당히 주관적일 경우가 많다.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진실이 저널리스트에게 주어지는 한 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소설가는 거짓을 통해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라고 했던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말에 비추어 보면 허구로서의 진실이 사실로서의 진실보다 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헤밍웨이 역시 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글을 쓰는 사람의 고민은 변하지 않습니다. 작가 자신이 변할지언정 고민은 언제나 같습니다. 작가의 변치 않는 고민거리는 어떻게 진실만을 말할까, 무엇이 진실인지 깨달은 후에 이것을 어떻게 글에 녹여내어 독자의 삶 일부가 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p.233)
<더 저널리스트:어니스트 헤밍웨이>에는 고교 졸업 후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약 25년 동안 작성한 400여 편의 기사와 칼럼 중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기사를 선별하여 실었다. 10대 후반이었던 1919년에 '캔자스 시티 스타'의 기자가 된 헤밍웨이는 1921년에 '토론토 스타' 특파원으로 유럽으로 건너갔고,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북미 뉴스 연합' 통신원으로 활약했다. 기자 생활을 통해 익힌 직설적이고 간결한 문장, 대화체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는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당시의 시대 상황을 통해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인간의 고통,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을 확인하면서 작가로서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했다.
"좋은 글이란 진실을 쓰는 거지. 작가가 인간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얼마나 충실하게 삶을 살았는지에 비례해서 이야기가 더 진실되게 느껴지거든. 그래야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 거야. 작가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야지. 물론 몰라도 운 좋게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지. 판타지 소설을 쓰든가. 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가짜 글을 지어낼 수밖에 없어. 가짜로 지어낸 글을 몇 번 쓰다 보면 더 이상 양심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p.245)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이 작가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일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의 여러 덕목 중 다른 어느 것보다도 경험을 중시했던 헤밍웨이에게는 그가 경험했던 기자로서의 삶이 훗날 그의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 장면들을 생생하게 되살리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경험으로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고 했던 그의 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인생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깨닫는 만큼 성장하고, 성장한 만큼 삶은 가치와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헤밍웨이의 저널리즘 작품만 선별하여 소개하는 이 책은 헤밍웨이의 진실된 면모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조금쯤 풀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