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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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당신의 기억이 나의 기억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서로의 기억과 기억이, 당신의 과거와 나의 과거가 서로의 갈피 속으로 거부감 없이 갈무리되는 것임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사랑에 무지했던 우리는 온 정성을 다해 상대방의 기억을, 흔하지 않은 과거를 서로의 기억 속에 더함으로써 살아가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는 걸 회상과 되새김을 통해 배우곤 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에 대한 살풋한 기대와 떨림이 알 수 없는 불안을 억누르는 동안 우리의 곁을 스쳐갔던 여러 계절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오늘처럼 어둡고 이따금 물기 없는 눈이 흩어지듯 내리는 날, 장혜령의 에세이 <사랑의 잔상들>을 읽는다는 건 꽤나 운치 있는 일이지만 현실로 통하는 여러 통로들을 차단한 채 무작정 혼자가 되고 싶은 감정에 휘말리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현실로부터 한발 비켜선 듯한 느낌은 내가 마치 투명 망토를 입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 높이 두둥실 떠올라 까마득한 곳에서 현실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합니다.

 

"단 한 번도 지우개를 가진 적이 없었다. 생의 핵심을 그린 적도 없었지만 지우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지울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그린 캔버스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 우리는 매일 쉼 없이 어딘가를 오갔는데 그건 어떤 지도에도 표시된 적이 없다. 눈길 위에 새겨진 바퀴 자국, 차창에 부딪힌 새의 주검. 분명 우리는 지운 적이 없었다." (p.60)

 

학습을 통해 억지로 주입하거나 세월을 대가로 어렵게 얻어진 것들만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전부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기억이 사랑이라는 전파를 타고 무한대의 용량으로 밀려와 내 기억 속에 너무도 쉽게 스며들었을 때, 그것은 마치 하나의 기적처럼 기억에 대한 나의 편견을 부숴버렸습니다. 단 몇 차례의 눈길과 작은 관심만으로도 그 많은 기억들이 내게 옮겨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고, 처음으로 사랑에 눈 뜬 풋내기는 비로소 사랑의 기적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한 점과 또다른 타인의 한 점이 만나는 이미지를 목격한다. 개별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건(언제나 축적된 시간 속에서, 그를 통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곧 사건이다), 그러나 맞닿는 순간 서로의 과거를 포용한다. 포용한다는 것은 서로의 속내를 듣고 이해하거나 존중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두 개의 사건이 맞부딪친다는 것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설령 물리적으로 과거가 공유되는 지점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p.186~p.187)

 

작가 장혜령은 우리가 경험했던(혹은 경험했음직한) 보편적인 것들, 예컨대 여행, 사랑, 이별, 비밀, 독서, 영화, 사진, 그림 등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기록함으로써 우리가 무심코 흘려버렸을 만한 것들을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 승화시킵니다. 여행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비밀을 가진 사람/ 칼을 놓는 사람/ 이별하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 사랑 이후의 사람, 총 일곱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출간이 기약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써내려갔을 많은 글들이 경계와 틀을 허물고 세상 밖으로 나옴으로써 우리에게 스며들게 될 작은 기억들일지도 모릅니다.

 

"흔히 표현은 나로부터 먼 곳에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데서 도래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생각하며 표현에 다가가고자 했다. 내가 느낀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본 것을 씀으로써 읽는 사람이 그 장면을 느낄 수 있으면 했다. 보는 것은 나이지만, 내 감정을 지우고 이미지를 남길 때 그 표현은 비로소 시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나라고 적을 주어 자리에 타인이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p.217)

 

예정에도 없었던 삶을 우리는 등 떠밀려 사는 격이지만 우리가 얻고 가는 한 줌의 기억들은 한낱 덤으로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기억은 곧 자신의 삶이라는 등가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장혜령의 <사랑의 잔상들>을 읽는 순간, 작가의 십 년 세월이, 그 기억들이 우리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라는 전파를 타고 무한대의 용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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