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평점 :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감지하는 데서 온다. 그러므로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그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어떤 확신을 갖고 믿는다는 건 타인을 존중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예컨대 그와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이해득실이나 체면 따위와는 상관없이 타인을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주어진 나의 역할과 존재 이유가 타인의 그것과 같을 수도 없으며, 우리가 보는 수많은 역할들이 어느 건 고귀하고 어느 건 천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까닭도 각각의 역할들이 그 빛깔을 조금씩 달리 하며 스스로 빛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마리아에게 은밀한 기쁨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태극기를 팔러 가는 일이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떼다 팔던 시절, 마리아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 꾸러미를 리어카에 싣고 팔러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다 무엇에 홀린 듯 태극기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는데 그건 어쩌면 열아홉 살의 마리아가 미지의 나라 독일로 출발하는 순간에 보았던, 태극기가 무수히 펄럭이던 장면의 뒤늦은 효과인지도 몰랐다." (p.59)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권여선 작가의 단편 소설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마리아의 죽음과 남겨진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드러낸다. 살아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마리아의 존재가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새롭게 부각되었던 까닭은 그녀의 삶이 두드러지게 헌신적이었다거나 이웃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거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그녀의 삶은 너무나도 미미했고, 있는 듯 없는 듯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다 떠났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안에서 가장 사소하고 미천한 존재인 막내 마리아는 자라면서 가능한 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자기 존재를 감추고 무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숨어서 공부했고 숨어서 성당에 나갔고 숨어서 일을 꾸몄다. 그 은신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마리아가 파독 간호사를 지원해 독일로 떠난 후 사흘이 지나도록 집안에서 그녀의 부재를 눈치챈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죽기 전까지도 숨어서 약을 먹고 주사를 놓았으므로 마리아가 죽을 만큼 아프다는 것을 눈치챈 이웃이나 성도는 아무도 없었다." (p.44)
소설은 마리아가 일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성당의 성도들이 그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신장암을 앓던 마리아가 혼자 진통제를 투여하며 죽음의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부 수립 무렵 완고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아가 체득한 생존 전략이 최대한 자신을 숨기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고단한 노동과 고독 속에 살다 세상을 떠난 마리아에 대한 뒤늦은 이해와 연민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고귀한 삶'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게 한다.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가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p.67)
성당의 가을 바자회가 끝나가는 파라솔 아래서 죽은 마리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리아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자신들의 무관심을 자책하며, 마리아가 돌보던 어린 소피아의 입양을 앞다투어 주선할 듯이 떠들어대지만 현실에서의 그들은 당장 내일, 아니 바자회가 끝나는 그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마리아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자신의 고독이나 고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생을 일관되게 살았던 마리아와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선한 척, 고고한 척 살아가는 우리들 중 과연 누구의 삶이 고귀한 것인가? 작가는 소설 속 인물 베르타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라고 말했던 마리아. 자신의 운명과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고자 했던 마리아의 일관된 태도는 이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계절을 살아내기 위해 내가 가진 힘 중 필요한 힘을 쏟아붓고 있는가.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