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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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딴따라 느낌이 난다. 첨단 과학과 신문물이 난무하는 21세기에 어릿광대의 어설픈 몸짓과 차력쇼, 서커스 공연 등을 보여주던 6,70년대의 레트로 감성이 책 속에서 묻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을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이 과거의 어느 시점도 아닌데 말이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원숭이가 약장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따라 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전적으로 1992년생의 젊은(?) 작가 문은경의 찰진 레트로 감성과 캄보디아라는 공간적 배경이 잘 어우러진 탓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소설 속 인물들, 그중에서도 여행을 핑계로 캄보디아 교민 사회에 난데없이 불쑥 떨어진 '박지우'라는 인물의 입체적인 개성이 소설 전체를 활기에 차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 안 태어나서 다행이니?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스스로가 역겨운 인간이 된 것 같다. 부정적인 생각만 생기는 건 아니다. 이상한 감상에 휩쓸릴 때가 있다. 절대로 살아볼 일 없는 과거를 경험하는 기분이랄까. 어른들의 기억, 책, 영상 자료와 같은 증거물로 남은 과거의 시공간 속에 발을 디딘 것만 같은 착각,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경험이 꽤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p.85)

 

2019년 1월 프놈펜으로 떠나 열대의 무더위와 싸우면서 책상에 앉아 매일 여덟 시간 동안 소설 쓰기에 몰두했었다는 작가의 집념은 독자의 손에서 높은 가독력으로 전환된다. 뭐 하나 똑 부러지게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이 시대의 평범한 젊은이 박지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부터 작가는 어수룩한 주인공을 통해 삶의 유머와 페이소스를 독자들에게 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책의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설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박지우가 아닌 고복희이다. 한눈팔지 않고 언제나 자신이 세운 원칙을 지켜내려 애쓰는 고복희와 자신만의 주관도 없이 허구한 날 방에 처박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다른 사람의 일상만 뒤적이는 박지우의 모습은 극과 극의 대치를 이루면서 소설 속 고복희라는 인물을 도드라지게 한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이 까칠하고, 자신이 세운 원칙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려 하며,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고 때로는 못 본 척 눈 감아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며, 그로 인해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모난 돌이자 고기가 살지 않는 맑은 물로 지낼 수밖에 없는 고복희.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얼떨결에 프놈펜을 방문하게 된 박지우와 망해가는 호텔 원더랜드의 사장 고복희와의 우연한 만남과 한 달간의 불편한 동거. 그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서로의 내면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냉담하며 이기적인가 하는 문제를 독자들 각자에게 짐처럼 떠안긴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만 하며 산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니까.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나아가 당신의 도덕성을 시험하려 들 거예요. 부당한 상황에 밀어놓고 옳지 않은 선택을 하게끔 유도하겠죠. 좌절하는 당신을 조롱하고 헐뜯을지도 몰라요." 상관없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니까.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걸로 족하다. 고복희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장영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p.205)

 

최루탄 냄새가 그득했던 캠퍼스에서 만나 토요일 밤마다 디스코텍을 방문했던 장영수와 고복희. 절대 춤을 추지 않는 고복희와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는 장영수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 채 결혼을 했고, 남들처럼 열심히 살았다. 퇴직 후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서 살자던 장영수의 말에 따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자리를 잡은 고복희는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장영수가 없이 혼자의 몸이다. 중학교에서 로봇처럼 말하며 행동했던 까닭에 학생들로부터 인기도 없었던 전직 영어교사 출신인 고복희도 이제 쉰 살이 되었다.

 

"고복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원더랜드가 먼지투성이인 공간이 돼선 안 된다. 린의 월급이 밀려선 안 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하루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고복희를 두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계의 질서가 그런 것이라면, 그리고 거기에 순응하지 못한다면, 결국 낙오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혼자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복희의 선택이었고 기꺼이 감당해야 할 자신의 몫이었다." (p.229)

 

나처럼 머리가 나쁜 인간에게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알려주는 철학보다는 한 번에 한 가지만 알려주는 소설이 맞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책이다. 삶에 대한 가르침이든 인간에 대한 진실이든 말이다. 소설이라는 스토리를 통해 길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숨은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는 소설을 통해 삶을 배우고,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인간관계를 익힌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박지우처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듯하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이렇게 뒹굴뒹굴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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