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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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사뭇 차가워졌다.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마냥 기세가 등등하던 여름도 어느새 과거 속으로 저만치 멀어진 느낌이다. 틈만 남기고 살짝 열어두었던 창문도 새벽이면 으스스한 추위에 놀라 완전히 닫게 된다.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법칙, 어쩌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나 환상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흘려보낸 시간에 대해 그리워하거나 더없이 아름다운 환상을 품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하지도 않은 소설 속 판타지로 인해 때로는 마음속 상처가 덧나기도 하고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하는 까닭에 나는 시간을 거스르는 이야기는 가급적 멀리하곤 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건성건성 간신히 읽어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이꽃님 작가의 소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의 내용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언질이나 약간의 귀띔만 있었어도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책이든 일단 책을 손에 잡으면 다 읽기 전에는 놓지 못하는 고약한 습관 탓에, 혹은 편지 형식으로 쓰인 스토리 전개가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 탓에 나는 이따금 눈물을 훔쳐가며 끝내 다 읽고야 말았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두 명의 은유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동등한 입장에서 기성세대와 청소년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네 엄마 물건을 15년 만에 다시 꺼내 봤단다. 그땐 네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아 유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더구나. 엄마의 다이어리 속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편지가 있었다. '은유에게'라고 적힌 걸 보니 아마도 네게 보낸 듯하다. 엄마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끝까지 널 놓지 않았으니까." (p.215)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오가는 편지를 통해 이야기의 서사가 만들어지는 소설의 구성이나 형식으로 볼 때 약간의 작위적인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이 소설이 '제8회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걸 감안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엄마를 잃은 은유가 비록 편지 상의 만남이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엄마와 생각을 나눈다는 발상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미는 뭉클한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위로의 편지가 되는 셈이다.

 

"어쩌면 우린 너무 많은 기적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겠어. 엄마가 딸을 만나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울고 웃는 평범한 일상이 분명 누군가한테는 기적 같은 일일 거야. 그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p.217)

 

소설은 싱글 대디인 은유의 아빠와 은유가 바닷가 카페에서 느리게 가는 우체통에 넣을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은유의 아빠는 곧 재혼을 앞두고 있다. 엄마의 얼굴도 모르는 채 15살이 된 은유는 처음으로 가지게 될 새엄마의 영 껄끄럽고 마뜩잖다. 그런 은유에게 1년 뒤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보라는 아빠의 제안은 불만투성이의 은유로 하여금 가출 서약서를 쓰게 만든다. 그러나 억지로 쓴 은유의 편지는 1년 뒤 자신에게 배달된 것이 아니라 34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82년의 또 다른 은유에게 전해진다. 2016년의 시간대를 사는 15살의 은유와 1982년의 시간대에 사는 초등학생 은유의 편지 교환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2016년의 은유는 자신에게 배달된 편지가 누군가 보낸 장난편지인 줄로만 알고 화를 내지만 1982년의 은유가 보낸 500원짜리 행운의 동전을 받은 후 오해가 풀린다.

 

현재의 은유와 과거의 은유 사이에는 시간의 속도가 다르게 존재한다. 2016년의 은유가 1년을 살아가는 동안 1982년의 은유는 20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식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의 차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호칭 역시 변해간다. 초딩이 동생으로, 다시 너로, 언니로, 이모 아닌 언니로... 그렇게 호칭이 변해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믿음이 싹트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고, 급기야 2016년의 은유가 보낸 정보를 바탕으로 평생 궁금해하던 '엄마'의 존재를 찾아주기로 한다.

 

두 사람 사이의 편지는 2002년 은유가 태어난 해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엄마의 비밀을 밝혀줄 아빠의 편지와  유품으로 찾아낸 은유 엄마의 마지막 편지가 펼쳐진다. 현재의 은유가 태어난 날이 과거 은유의 기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인연. 비록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의 과거도, 딸의 미래도 이보다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리라.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엄마가 나에게 보낸 편지, 나를 낳기도 전의 엄마에게 사춘기의 내가 보낸 편지. 은유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엄마의 편지를 오래도록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이를 먹어서 좋은 점도 있긴 있더라고. 그게 뭐냐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정을 이해하려고 연습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p.175)

 

밖에는 지금 다가오는 17호 태풍 타파를 예감하려는 듯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결코 가질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환상이나 그리움이 때로는 누군가의 손에서 한 편의 소설이 되기도 하고, 그리움이 무르익어 터질 듯한 슬픔으로 맺히기도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리움을 통해 시간을 배우고 환상을 통해 호기심과 모험 정신을 키워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마음속에 시간을 쌓아가면서 두고두고 그리움을 키우게 된다. 어쩌면 소설 속 은유처럼 더 이상 오지 않을 편지를 한평생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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