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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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택지조성사업 현장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나무를 베어내고 산과 구릉의 속살이 드러난 자리에 선캡과 마스크로 중무장을 한 아줌마들이 아주 오래 전의 집터인 듯 보이는 매장문화재 발굴터에서 세월아 네월아 솔질을 하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은 너른 공터에는 뙤약볕과 마른 먼지만 가득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었다. 그 허허로운 풍경에 점점이 박힌 저 여인네들은 도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고 성과도 없는 무한 반복의 솔질을 해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들의 어깨 위로 비스듬한 석양이 쏟아지고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파란 방수포가 씌워졌다.

 

"시간여행을 꿈꾸는 인간의 판타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고고학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꿈꾸던 찬란한 과거 같은 건 없다고 밝혀진다 해도 혹은 인류가 바라마지않는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시간여행을 꿈꿀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이라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색다를 시공간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에 있다." (p.26)

 

내가 어느 택지조성사업의 현장에서 보았던 황량하고 나른한 풍경은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에도 그대로 옮겨진다. '고고학자들은 흙먼지 자욱한 열악한 환경에서 발굴을 합니다'로 시작되는 그의 저서는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고고학에 대한 편견이나 헛된 상상을 일거에 깨트린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이나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사막지대에서 거대 공룡의 화석을 발굴하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어렵게 발굴한 토기 조각을 통해, 토기의 밑바닥에 남아 있는 식물 성분을 통해 과거의 생활상을 연구하고 그 시절의 문화와 풍습을 상상하며 이를 통하여 알게 된 고고학자들의 지식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게 그들의 임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짧게는 100여 년 전서부터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기까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더욱 또렷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고고학자인 셈이다.

 

"사람들이 고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물이 주는 여러 가지 창의적인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전시품 안에 잇는 유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고고학에서는 하나의 유물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또한 새로운 유물은 계속 발견되고 그에 대한 해석 역시 계속 바뀐다. 이렇듯 고고학에는 정답이 없다. 고고학은 매일 바뀌어가는 일상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p.277)

 

고고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내가 고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의 이 책에 매료되었던 까닭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마도 저자의 유려한 문체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그것은 고고학자로서의 풍부한 현장 경험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러시아, 시베리아, 몽골, 중앙아시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직접 발굴을 주도했다는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실제 발굴 이야기들을 실감 나게 전하고 있다.

 

"초원을 조사할 때에 틈만 나면 땅에 누워보곤 한다. 그러면 온갖 풀들의 희미한 향이 더 또렷하게 맡아진다. 민트향, 맵싸한 향, 달콤한 향, 이 초원의 향은 순간 다른 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수천 년간 이 땅에서 살아온 유목민들의 삶 속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들과 나는 이렇게 향기로 소통을 한다. 나 혼자 하는 공상일지도 모르겠지만." (p.144)

 

책을 읽는 독자는 고고학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밝히는 고리타분한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무덤을 발굴한 고고학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무덤에서 발굴한 여러 유물을 통해 추론하고, 검증하며, 때로는 상상을 통해 종합한다. 노련한 형사가 작은 단서들을 취합하여 범인을 확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확증하기 위해서 고고학자는 무덤을 발굴하고, 향기와 음악과 음식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며 마약이나 젓갈 또는 문신과 같은 생소한 분야를 탐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고고학은 한 시대를 연구하는 종합학문인 셈이다.

 

"살아가면서 경험한 행복한 기억은 동시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때에 대한 슬픈 기억이기도 하다. 타투는 고통스러운 행위이지만 그럼으로써 그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몸의 감촉과 정신의 기억이 함께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타투야말로 몸에 새기는 마음의 지도가 아닐까 싶다." (p.191)

 

나는 산길을 걸을 때마다 과거에 이 길을 걸었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곤 한다. 그들도 나처럼 헐떡거리며 저 언덕을 숨 가쁘게 올랐고, 정상의 바위 위에 앉아 흐르는 땀을 식혔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녹색의 삼림을 보며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했을까. 저 멀리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들을 손에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처럼 허망하게 바라만 보았을까. 내가 걷는 이 길 위에서 그들도 나처럼 별의별 생각들을 떠올리면서 상념에 젖곤 했을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을 읽었던 오늘, 나는 먼 과거를 향해 시간여행을 한다. 그들도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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