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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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을 신림동에서 보냈다. 가파른 산비탈까지 올망졸망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마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집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돈이 들지 않는 자재들로 얼기설기 엮어 겨우 집의 형태를 갖춘 듯한 그런 집들이 대부분이었고, 겨울이면 연탄재가 없이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른다는 게 어설픈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었다. 그 동네에서 대학을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대개 육체노동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자니 이 집 저 집에서 술판이 벌어지는 건 다반사였고, 그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이유도 없이 싸움이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취객들의 소란과 싸움판의 악다구니를 참아내며 겨우겨우 잠을 청하곤 했다.

 

재개발로 아파트만 빽빽하게 들어선 새로운 환경으로 바뀐 지가 오래되었건만 나는 지금도 신림동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텔레비전 뉴스로 접할 때마다 대학 시절의 신림동을 떠올리게 된다. 신림동은 원래 그런 동네였다는 걸 잊지 않으려는 듯 말이다. 지난 5월 신림동 소재 원룸에 사는 20대 여성을 뒤따라가 집에 침입하려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 모 씨의 재판이 있었던 며칠 전, 묘하게도 그날 화장실 창문을 통해 원룸에 침입한 뒤, 이 집에 사는 여성을 강간하려 한 사건이 또 있었다. 다행히도 용의자 A 씨는 어제 경마장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딩동. 초인종이 또다시 울렸다. 여자는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들은 소리가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해 당황했다. 딩동. 한 번 더 울리자 그제야 서늘한 공기가 여자의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여자를 찾아올 사람도 없었고, 이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더 남은 택배도 없었다. 무엇보다, 새벽 3시였다. 이 시간에 초인종이 울릴 이유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p.20 '새벽의 방문자들' 중에서)

 

페미니즘 소설집 <새벽의 방문자들>을 읽기 전까지 나는 혼자 사는 여자들의 공포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내 일인 양 느끼거나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표제작인 장류진 작가의 '새벽의 방문자들'을 읽었을 때 '아, 정말 공포스럽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소설에서 30대 초반의 여자 주인공은 포털사이트의 관계사에서 댓글 모니터링 업무를 맡고 있다. 게시물 규정에 어긋나는 댓글이나 신고받은 댓글들을 직접 확인하고 블라인드 처리하는 일을 하는 그녀가 더블타워 오피스텔로 이사 온 지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15층짜리 건물 두 동의 오피스텔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결혼을 염두에 두다 헤어진 후 급하게 이사를 온 여자는 어느 날 미뤄두었던 옷장 정리를 하던 중 모르는 남자가 초인종을 누르는 걸 문에 달린 렌즈를 통해 확인하고 급기야 비밀번호마저 마구 눌러대는 통에 무척이나 놀란다. 그것도 새벽에. 그리고 모르는 남자들이 한밤중에 자신의 집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일이 반복된다. 여자는 정황상 옆 동의 자신과 같은 호수에 사는 여성이 성매매를 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여자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B동 1204호로 향한다. 그리고...

 

표제작인 '새벽의 방문자들'에 이어지는 소설은 하유지 작가의 '룰루와 랄라'. 정지향 작가의 '베이비 그루피', 박민정 작가의 '예의 바른 악당', 유일한 남성인 김현 작가의 '유미의 기분', 마지막으로 김현진 작가의 '누구세요?'가 실려 있다. '스쿨 미투'를 다룬 김현 작가의 작품이나 돈 때문에 아이를 포기한 청춘의 삶을 그린 하유지 작가의 '룰루와 랄라'도 인상 깊었지만 나는 사실 김현진 작가의 '누구세요?'가 가장 궁금했었다. 모 인터넷서점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으면서 이따금 댓글을 달기도 했던 나는 그녀가 쓴 에세이를 두어 권 읽었었고, 자신의 삶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던 그녀의 글에 다소 충격을 받았고, 블로그에서 볼 수 없는 그녀의 삶이 이따금 궁금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이 소설집의 독자는 여성분들이 대다수일 거라 생각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아볼 상상력이 없는 어떤 남성들에게 '옆집에 놀러갔더니 자고 있던' 싱싱한 성적 대상이 되면 기분이 어떨지 묻고 싶었다." (p.266)

 

'누구세요?'에서 김현진 작가는 역시나 도발적이고 거침없었다. 술에 취해 무작정 뛰어든 옆집에서 침대 위에 잠든 남자를 덮쳤지만 남자는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잠에서 깨지 않는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표현 역시 적나라하지만 '성적 대상화' 되는 상대를 남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의 위치를 전복시키는 점도 재미있다. 페미니즘 소설로 지칭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하는 권리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 잘못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그게 대한민국만의 문제일까마는 누군가의 문제를 내 일인 양 느낄 수 없는 구조, 그런 피폐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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