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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권여선의 소설 <레몬>은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떤 룰처럼 존재해왔던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비교적 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세상에 대해 순수한 믿음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구나 아름답다는 이유로, 남들처럼 영악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쉽게 정복되거나 사회로부터 강제 퇴출되는 이러한 현실이 과연 정당한 것이냐고 작가는 묻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해언을 통해서 말이다. 월드컵 열기가 전국을 강타하던 2002년 여름, 당시 열아홉 살이던 해언이 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같은 반 친구였던 상희의 눈에 비친 해언은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그렇지만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순진한 소녀였다. 사인은 두부 손상에 의한 죽음. 그러나 범인이 잡히지 않은 채 17년이 흘렀다.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p.179)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던 아빠가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해언은 '무심하고 냉담하고 말도 없고 웃지 않는' 아이로 성장했다. 속옷을 입지 않은 채 소파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는다는 이유로 엄마로부터 여러 번의 지적과 꾸지람을 받으면서도 해언은 자신을 지키는 것에 무심한 아이였다. 그런 해언을 곁에서 지켰던 건 동생 다언이었다. 여섯 살부터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고 언니의 옷차림을 신경 쓰는 등 해언에게는 마치 언니인 듯한 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서울로 이사를 온 상희의 눈에 비친 해언은 '비현실적 아름다움'을 지닌 친구였고, 해언과 상희가 고3이었을을 때 같은 학교에 입학한 다언은 언니처럼 예쁘지는 않았지만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데다 매사에 싹싹하고 야무졌으며 무엇보다 전교에서 제일 자주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였다. 상희와 같이 문예반 활동을 하던 다언을 대학 교정에서 우연히 만났다. 성형수술을 하여 모든 게 어색하게 변한 비쩍 마른 다언을.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p.78)
소설은 당시 사건을 한순간도 잊지 못하는 다언의 상상 속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한만우를 담당 형사가 취조하는 장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만우는 신정준이 운전하던 차에 동승한 해언을 목격했던 인물. 그러나 그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동승했던 윤태림이 있었다. 상희와 같은 반이었던 윤태림은 해언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위태로운 예쁨'을 지닌 인물이었다. 운전에만 몰두했던 한만우는 윤태림으로부터 목격 장면을 전해들었고 형사에게 그대로 증언했다. 반면 해언을 자신의 차에 태웠던 신정준은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사건은 그렇게 미제로 남았다. 그러나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졌다.
"엄마와 나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엄마는 다니던 숍을 그만두었고 나는 학교를 휴학했다. 우리는 며칠씩 잠만 자거나 며칠씩 잠을 못 잤다. 먹는 것을 잊었고 씻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위로 기어올라가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오랫동안 우물 같은 축축한 어둠 속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p.72)
사건의 용의자였던 한만우와 신정준도 학교를 떠났다. 신정준은 유학길에 올랐고, 한만우는 학교를 자퇴한 후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다 군에 입대한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채 살해되었던 해언. 해언을 잃고 상실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다언은 어느 날 배가 고파 삶은 달걀을 먹다가 계란의 노른자를 보면서 주요 용의자였던 한만우를 찾아갈 결심을 한다. 군에서 앓게 된 골육종으로 의가사 제대를 한 한만우와 난쟁이 병을 앓고 있는 한만우의 여동생. 그리고 한만우의 여동생이 만들어준 계란프라이에서 보았던 애틋한 노란빛. 다언은 한만우로부터 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복수를 결심하게 되는데...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상에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여름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또 하루를 살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을 외면하거나 전혀 모르는 채 사는 까닭에, 또는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돌아간다는 이유로 우리는 종종 죽음의 무게를 과소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았던 시공간의 영역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금 뒤틀리고, 때로는 미세한 틈을 만들고, 산 자로 하여금 어제와 달라진 오늘을 살게 한다.
"아이들은 여전히 조그맣게 속살거리거나 장난을 쳤다. 그러다보면 웃음소리가 높아지거나 고함을 지르게도 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웃음과 고함의 파문은 널리 퍼져나가는 대신 그대로 응결되어버렸다. 웃거나 고함을 치던 아이가 소리를 뚝 그치는 순간 기분 나쁜 정적이 교실 전체에 무겁게 드리웠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혔고 교실은 진공관처럼 조용해졌다. 이상한 우울과 불쾌가 우리의 미간을 둔중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p.57)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문득 떠오르는 오후. 작가 권여선은 자신의 소설 <레몬>을 통해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약자를 극단적인 죽음으로 내모는 작금의 현실 또한 작가의 눈에는 결코 정당하게 보이지 않았을 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단지 세상에 대해 무력하거나 순진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놀잇감이 되고, 종국에는 세상으로부터 축출되거나 격리된다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작가는 다언의 입을 통해 항의하고 있다. 그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게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