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 글로벌 거지 부부 X 대만 도보 여행기
박건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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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긴장감 속에 느슨한 일상을 살 때가 있다. 자신은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듯 어느 때보다 강한 긴장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나의 일상이 한껏 느슨해 보이는 것이다. 박건우의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박건우의 책이 처음인데 나의 생각과는 달리 작가는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글로벌 거지 부부'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그는 부인인 미키 씨와 최소의 경비로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글로벌한 거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자녀 계획이 없다. 만약에라도 애가 생긴다면 이민을 와서라도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에 잠기며, 단념했던 평범한 미래를 그려본 게 얼마 만이던가." (p.86)

 

작가의 생각이나 현재의 삶이 범상치 않은 듯하여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 그와 연관된 글들을 찾아보았다. 인터뷰 기사도 있고, 작가가 쓴 칼럼과 여행 팁 등 다양한 글들이 올리와 있었다. 물론 동영상도 여럿이었다. 게다가 박건우의 팬을 자처하는 블로그 글도 많았다. 먼저 눈에 띄었던 건 그의 최종 학력이 고등학교 중퇴라는 거였다.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듯 보였던 작가는 반항아 기질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했고, 그때부터 작가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던 듯하다. 기타를 치며 잠시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관광비자로 가게 된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여 돈을 조금 모았고, 모은 돈으로 노인들이 타는 세발자전거를 구입하여 타고 일본 열도를 여행하기도 했단다. 여러 건의 단기 알바를 전전했고, 태국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 여행객 미키를 보고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애를 생략한 채 바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는 대만 도보 여행의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총 68일에 걸친 1,113km의 대장정을 담은 그들만의 이야기이다.

 

"친구의 장례 직후 내 삶은 엉망이었다. 무작정 귀국한 탓에 돈도 없었고, 먹고살 대책도 없었다. 당장 잘 곳조차 없어 대전역 부근의 여관 달방에 살았다. 밤이면 마음이 뒤숭숭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자는 것이 고통이었던 나는 일본에 있던 미키를 대전으로 불렀다. 우리는 처절할 정도로 가난한 여관살이를 했다. 이후 소일거리를 잡고 틈틈이 책을 쓰면서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해 무리를 해서 거처를 서울로 옮기고, 이듬해 허름한 전셋집을 마련하면서 이번 대만 여행도 가능해졌다." (p.110)

 

박건우 작가가 지나쳐 온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어쩌면 작가가 어렸을 적에 꿈꾸었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어쩔 수 없이 살긴 살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지금과 같은 삶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서울에 거처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다른 나라를 전전하면서도 살아야 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족하면서 살아야 스트레스도 덜 받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막상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무척이나 어려웠을 일도 아주 쉽게 해결되기도 하고, 세상에는 나를 걱정하고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친절이 몸에 밴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는 게 아닐까. 떠나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일들.

 

"그러고 보니 800km를 돌파했다. 한창 뜨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거리다. 대만을 걷기 7주 전에 산티아고를 다녀온 나는 그로부터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시기에 800km를 두 번째 걷고 있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오늘까지 버텨준 내 다리에 대해 기특함이나 건강한 육신에 대한 감사함은 느끼지 않았다. 감사를 하자면 선심을 베풀어준 대만인들, 그리고 당연히 미키에게도 하고 싶다." (p.282)

 

우리는 종종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출생에서 비롯된 여정은 성장의 단계를 넘어 노년으로, 그리고 종착지에 다다르게 된다. 물론 우리네 삶의 목적이 죽음은 아니지만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여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 우리 모두가 두려움 없이 인생을 시작하는 것처럼 여행도 그렇게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인생의 축소판과 같은 여행에서 우리는 많은 우연과 마주하게 되고, 그 우연을 통해 비로소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더불어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을 시작할 때 많은 게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우리 앞에 펼쳐질 여행의 우연성을 믿는다면 여행에 앞서 우리가 준비할 것은 다만 한 줌의 용기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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