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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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시인답게 하는 것은 일상에서 삶의 진폭을 남들보다 한층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감각의 촉수를 다방면에 걸쳐 놓은 채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평생을 시인으로 산다는 건 고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러하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벚꽃 만개한 이 계절을 그냥 넘기기 아쉬워서 고른 책이었다. 시를 즐기거나 시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위치도 불문명한 먼 이국의 언어인 양 한동안 그렇게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 내 가슴에 기척도 없이 툭 하고 내던져지는 문장이 있다면 '아, 나는 제대로 읽고 있구나' 자평하면서 혼자 우쭐해하는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과거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머리보다는 가슴에서 먼저 깨닫게 되는 것도 시집을 읽을 때였으니 나는 어느 종교의 경전을 읽는 것처럼 두 손 가득 공손히 시집을 펼쳐 든 채 깨달음의 순간만 시시각각 기다리는 것이다.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조용한 날들)

 

다른 것 다 몰라도 이 한 문장.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그렇게 나는 '없음'이 영원성'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벼락이 치듯 한 순간에, 불현듯. 시인의 삶 속에는 생명이 없는 돌들이 파랗고, 하얗고, 때로는 붉게 살았다는 것과 죽음, 해골, 피, 생명, 심장, 입술, 맥박, 눈, 혀 등 생명이 손을 맞잡았거나 등을 맞댄 단어들이 제 딴에는 맥락도 없이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보는' 동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산다는 건 어쩌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독백처럼 되뇌었다.

 

1993년 등단한 뒤 20년 만에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펴낸 한강은 '저녁의 뒷면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무엇을 건너온 것일까'라고 묻는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한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서시)

 

시는 읽히는 게 아니라 만져지는 것이며, 그 만져지는 단어의 알갱이들이 쉽사리 부서지거나 약한 바람에도 휙 하니 날라가버리는 까닭에 손 안에 온전히 남는 시구는 많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한 일.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시인 한강의 마음 한 점이 내게 떨어졌다. '서랍에 넣어 둔 저녁'처럼 또는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처럼, 어두운 내 마음을 우련하게 밝히던 시인의 시구. 그리고 어느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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