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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우리는 매일매일을 삽니다. 하루라도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 수많은 날들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자신의 머릿속에 하나하나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결국 우리의 기억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징표인 동시에 소중한 누군가에게 전해줄 값진 유물인 셈이지요.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기기도 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다음 세대를 살아갈 누군가에게 마치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인 양 가만가만 들려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젊었던 시절의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동안 소중하게 쌓아오던 자신의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놓기도 합니다. 마치 자신이 간직하던 애착인형을 보여주듯 말이지요. 그러므로 사랑이 깊어진다는 건 상대방의 기억을 허구가 아닌 실재했던 진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며, 타인의 기억을 나의 기억으로 치환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가 김경욱이 쓴 <위험한 독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잘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독서치료사가 주인공인 이 소설에는 7년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찾아온 30세 구립도서관 사서이자 제빵 기술자를 꿈꾸는 여성이 피상담자로 등장합니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피상담자는 바람을 피운 남자 친구를 정리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망설이고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독서치료사인 주인공에게 자신의 상태를 과감하게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예컨대 첫 만남에서부터 여자는 "선생님 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밥벌레에요."라고 하더니 책에 대한 감상을 물었을 때에도 "저 같은 게 뭘 알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감지한 주인공은 여자에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그의 또 다른 책 <사양>을 권합니다. 여자는 주인공이 권한 책을 읽으며 서서히 변해갑니다.
"당신은 나에게 어떤 책이었을까. 당신이라는 책은 알베르 카뮈의『이방인』처럼 첫 문장부터 독자를 긴장하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호사스런 장정으로 독자를 압도하거나 자극적인 삽화로 독자를 현혹하는 책도 아니었다. 별다른 기대도 이렇다 할 사전정보도 없이 무심코 읽기 시작한 책일 뿐이었다. 더구나 당신이라는 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몇 번이고 책장을 덮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가." (P.25)
딸만 셋이던 집안에 넷째로 태어난 여자는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를 자신 있게 바라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자는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되고, 주인공은 자신의 독서치료에 반응을 보인 피상담자의 변화를 축하하는 의미로 구두를 선물합니다. 상담이 거듭되면서 여자는 급격하게 변해갑니다. '표정은 밝아지고 풍부해졌으며 상대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하는 버릇도 사라졌'고, 검정 일색이던 옷차림도 다채롭게 변하는 등 자신감 넘치고 화사해집니다. 최신형 휴대폰을 새로 구입하고, 개인홈페이지를 오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빵학원에 등록하면서 꿈을 향해 나아갑니다.
"당신이 그만 오겠다고 했을 때 불안의 근거는 분명해졌다. 당신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당신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들이 나에게는 아직 많았다. 끝이라니. 당신의 진면목을 읽어가는 나의 본격적인 독서는 비로소 시작될 참인데." (P.31)
사실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읽을 수도 있고, 나를 찾기 위해 읽을 수도 있고, 단순히 재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 인격 수양을 위해 읽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최상의 화두로 떠오른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책을 읽기도 합니다.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에서 여자는 책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나는 요즘 나를 잊기 위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 수시로 떠오르는 그 많은 기억을 안고 살기에는 나 자신이 힘에 부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수한 기억의 공격으로부터 잠시나마 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지금 김경욱 작가와는 다른 의미의 '위험한 독서'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