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사탕 내리는 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소담출판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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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문장이 소설 전체를 대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또는 소설 속 한 문장으로 인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가의 이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될 때도 있다.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의 책에서도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평소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던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에 의해 그 사람 전체가 새로이 규정되는 것과 흡사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별사탕 내리는 밤>을 읽었던 독자라면 누구나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는 것이다.'라거나 '절대 남자 생각대로 끌려 살지 않을 거야.'라는 문장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자신의 머릿속을 감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장도 있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 늘 술이 당겨."라고 했던 소설 속 미카엘라의 말에 나 역시 '그래, 맞아.'라고 동감하면서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게 아주 사사로운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거나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일반화 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다.

 

간결하고 확신 찬 듯한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길고 화려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유혹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가가 생각했던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여과 없이 옮겨놓는 듯하다. 벽돌을 찍어내듯이. 그런 까닭에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읽는다'는 느낌보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본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간결한 문장 속에 작가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심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와코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울렸다. 그리웠던 거다. 조금도 달콤하지 않은, 그렇지만 마음 편하고 친밀한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그 그리움은 현관에서 한 발 들여놓자마자 다부치가 웃음을 터뜨리며, "진짜 여기 사는 거예요?"라고 말했을 때도 강도를 더했고, "연기파네."라고 말했을 때도 강도를 더했다. 다부치가 한마디 할 때마다 다쓰야와 함께했던 결혼 생활의 거짓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면서 과거의 자신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건전한 자신이." (p.136)

 

 

소설은 주인공인 사와코(카리나)와 미카엘라(도와코), 미카엘라의 딸인 아젤렌의 일상이 번갈아가며 그려진다. 이따금, 그렇다 아주 이따금 소설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다쓰야와 사와코의 새로운 애인이 된 다부치가 등장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인물 구성이다. 단출한 인물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의외로 복잡하다. 남녀 간의 사랑 문제도, 결혼이라는 굴레와 이민자의 삶도, 이성 간의 사랑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도, 그리고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도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은연중에 떠올리게 된다.

 

십대의 어린 나이일 때부터 서로의 연인을 공유하기로 했던 사와코와 미카엘라.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설정에 잠시 당황할 수도 있지만 충격은 오래가지 않는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아,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자매가 그런 약속을 하도록 쓸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일본계 아르헨티나 이민자 2세로 자랐던 자매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을 테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공유하기로 하는 소녀들만의 약속은 우리에게 익숙한 제도나 관습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머리를 끄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매의 성격은 작가에 의해 극과 극으로 그려진다.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 언니인 사와코가 사귀던 다쓰야를 두고 미카엘라는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청한다. 그것도 언니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적극적인 성격의 미카엘라에 비해 사와코는 말도 안 되는 그 상황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사와코는 결국 다쓰야와 결혼하여 일본에 남고, 난잡한 생활을 했던 미카엘라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간다. 그 후 자매는 달라진 환경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딸 아젤렌을 돌보며 독신으로 살아가는 미카엘라와 사업에 성공하여 바쁘게 사는 다쓰야와 떨어져 도쿄 외곽에서 전원의 삶을 즐기는 사와코.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사와코는 자신의 스페인어 제자였던 다부치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향하는데...

 

"나는 엄마와 카리나가 어렸을 때 땅에 별사탕을 묻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게 일본 밤하늘의 별이 될 거라 상상했다는 이야기. 이 거리에 반짝이는 별은 그러니까 일본에서 누군가가 땅에 묻은 별사탕이겠거니 상상했다는 이야기를." (p.407~p.408)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쩌면 확신에 차 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헤어진 연인들은 서로의 사랑이 식기 시작한 시점을,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인지를 확연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은 어느 정도 정확하다. 상대방이 말하는 무언의 몸짓에서, 나를 향한 달콤한 말의 향연에서 사랑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는 어쩌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짜 사랑일지언정 모르는 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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