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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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한 해 해가 가면 갈수록 문학적 수사나 기교가 없는 담백한 글이 좋아진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 본 적 없는 화려한 수사의 문장을 접할 때마다 노트 한 귀퉁이에 적어 두거나 편지 상단의 계절 인사말로 써먹거나 하는 식으로 시간이 지나도 어떻게든 잊지 않으려 애를 쓰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화려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길 없는 담백한 글에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책의 내용보다는 문장의 화려함에 이끌리곤 했던 것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다고나 할까.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담백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딱 들어맞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는 것처럼 반복해서 읽어도 지겹다거나 지루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등단했던 그녀는 '이미 완성된 작가'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갖춘 작가였지만 팔 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만을 세상에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고국에서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세계를 향해 동경을 품었던 작가가 1960년대에 이미 유학과 국제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하였다는 사실과 2차 세계대전 직후 십삼 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하며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유럽의 모습은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기억의 올들을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풀어내고 잇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심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루를 올려보았다가 나는 실로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저녁해를 가득 받은 종루의 크고 작은 종들 아래 가로대 위에서 한 사내가 양쪽 손발을 사용해 춤을 추듯, 공중을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본 광경이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내의 모습과 함께 그의 온몸에서 솟아나는 듯한, 밀려왔다가 물러가는 파도처럼 여러 겹으로 포개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축일을 알리는 종소리가 떠오른다. 저 멀리 해가 뉘엿뉘엿한 평야를 뒤덮는 연보랏빛 안개와 함께." (p.42~p43)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사유했던 청춘의 한 자락과 2차 대전 직후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카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 국적을 초월하여 자신과 함께 순수했던 청춘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작가가 심취하고 동경했던 움베르토 사바, 알렉산드리아 만초니 등 이탈리아의 여러 문호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후 이십대의 젊은이였던 그들이 카톨리시즘을 보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자며 시작한 운동보다 사회변혁의 보폭이 훨씬 커서, 서점 친구들이 한순간 목표를 잃은 듯 보이던 무렵이었다. 나와 처음 만난 날 제노바 역으로 함께 마중나왔고 나중에는 나의 남편이 된 페피노가 1967년 마흔하나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유력한 대변자를 잃은 가티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무렵 서점은 경영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만 출판을 책임지던 가티가 슬럼프에 빠져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니 당연히 출판 부문은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p.102~p.103)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가 독자의 마음을 붙드는 이유는 밀라노의 안개처럼 모호하고 여러 겹으로 중첩되는 면이 있다. 작가가 경험했던 젊은 시절의 추억을 쫓아가다 보면 독자들 역시 아슴아슴 자신의 추억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작가와 함께 경험하다 보면 그게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아련한 슬픔이 되어 밀려오기도 한다. 책에서 나열되는 밀라노의 한 장면이 독자가 겪었던 구체적인 한 장면으로 치환되기도 하고, 그 순간 책장을 훑던 손가락도 방향을 잃고 만다. 어쩌면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사진 한 장. 한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제노바 기념묘지의 하얀 대리석 계단 위에서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내가 흰색 투피스를 입고 희미하게 웃고 있다. 일본을 떠난 지 사십 일째인 1953년 8월 10일 아침, 이탈리아에 막 상륙한 참이었다." (p.133)

 

이십대 말에서 사십대 초, 인생의 한창때를 회상하는 작가의 글은 강물에 찰랑이는 물비늘처럼 곱디곱다. 그 시절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그 시절 읽었던 책 속 한 구절처럼, 다정했던 사람의 낮은 목소리처럼 정겹다. 나이듦이 두렵지 않은 까닭 역시 현실의 고단함으로부터 우리의 눈길을 빼앗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 연후의 후유증이 밀라노의 안개처럼 잔득하게 달라붙는 금요일 오후, 스가 아쓰코의 추억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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