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 외 24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추억을 공유하던 가까운 사람을 잃는다는 건 과거의 기억 속으로 끝없이 빠져드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미래를 계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기억의 수렁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게 되고 어느 순간 현실로 되돌아오는 길을 잃고 만다. 과거를 향해 터벅터벅 걷다 보면 거대한 슬픔의 벽과 마주하게 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그림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의 표제작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는 예쁘지만 응석둥이로 자란 한 여인과 소설의 주인공인 내가 그녀와 우연히 얽혔던 묘한 추억, 그리고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그녀의 남편을 현실에서 만남으로써 갖게 되는 설렘과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물론 주가 되는 내용은 공주처럼 자란 한 여인과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틈을 우연히 비집고 들어가게 된 나의 추억이지만.

 

"여자와의 관계가 복잡해진 탓에 하숙집에서 쫓겨나고, 곤경에 부딪히고, 그래서 친구의 아파트에서 신세를 지게 되고, 스키도 타지 않는 주제에 영문도 모르는 스키 동호인 그룹에 끼게 되고, 결국에는 아무리 해도 좋아질 수 없는 여학생에게 팔베개까지 해주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우울해졌다." (p.34)

 

친구의 아파트에서 신세를 지게 된 나는 친구 덕분에 스키 동호회에 끼게 되었고, 동호회의 퀸카였던 그녀를 만났다. 부유한 집안의 응석받이로 자란 그녀는 총명하고 예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는 안하무인의 천부적인 독설가였다. 그녀의 총명함과 미모에 홀딱 반했던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나는 그녀의 까칠한 성격 탓에 그닥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호회 멤버들이 한 방에서 뒤섞여 잠을 자는 일이 있었고, 눈을 떠보니 그녀가 나의 왼팔을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일로 인해 그녀와 내가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지도 않았고 내가 교외로 이사를 하면서 동호회 멤버들과도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때의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되었다.

 

"나이를 먹는 것의 이점 중 하나는, 호기심을 갖는 대상의 범위가 한정된다는 것인데, 나도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서 기묘한 부류의 사람들과 사귀게 될 기회가 옛날에 비해서 훨씬 줄어들었다. 이따금 우연한 기회에, 옛날에 만났던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있지만, 그것은 마치 기억의 가장자리에 걸려 잇는 단편적인 풍경과 같아서,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특별히 그립지도 특별히 불쾌하지도 않았다." (p.37)

 

세월이 흘러 대학도 졸업하고 레코드 회사의 연출가로 일하는 나는 같은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의 남편을 일 때문에 우연히 만났고, 잡지에 실린 나의 사진을 보고 금세 알아보았다는 그녀에 대한 근황을 남편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전문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둬 결국 '여왕'이 되고 말 것이라는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져 평범한 여인으로 전락했다는 그녀. 나는 남편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았지만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아주 특수한 사건입니다. 저는 이따금 인간의 삶의 상당 부분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에너지에 의해서, 혹은 결손감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규정 되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은 그러한 것에 대해서 너무나 무방비 상태였어요. 요컨대" 하고 말하고 나서 그는 양손을 포갰다. "집사람은 자기 일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타인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아픔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죠." (p.42)

 

'타인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아픔'은 때로는 한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도 하고,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삶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도 한다. 과거를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는 추레한 모습의 한 인간을 상상해 보라. 우리는 누구나 그런 운명을 타고났을 뿐이다. 예외 없이 누구나. 타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누구에게나 그런 애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추억으로부터 얻는 슬픈 감정은 현실의 내가, 또는 미래의 당신이 그곳에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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