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우화
류시화 지음, 블라디미르 루바로프 그림 / 연금술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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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파가 주춤 물러나자 그 틈새를 비집고 미세먼지가 스며들었다. 그래서인지 며칠 전만 하더라도 청명하던 하늘은 운무가 내려앉은 듯 흐릿하기만 하다. 뿌옇고 답답하기만 한 시야.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리네 삶의 질이 점점 나아져야 마땅하거늘 나아지기는커녕 되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걸 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니러니가 없는 듯하다. 편하게 숨 쉬고 걷고 싶을 땐 언제든 걸을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찌 보면 삶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일 텐데 말이다.

류시화의 우화집 <인생 우화>에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위기 대처법'이라는 제목의 우화가 실려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헤움. 마을 사람들은 긴장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향유한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강둑이 무너져 마을은 물에 잠겼고 위기를 인식한 사람들은 모두 대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베렉을 비롯한 현자들은 농사조차 짓지 못하는 다른 지역들을 생각할 때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신의 축복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의회에서는 '위기'라는 단어 사용을 금지하고 '축복받은 환경'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홍수로 물고기를 잡지 못해 안식일에 생선을 먹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현자들은 밀가루로 붕어빵을 굽기 시작하고 식탁으로 뗏목을 만들었다. 그러나 금요일 아침 마을에 가득 찼던 물은 모두 사라졌고, 현자들은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지금이 오히려 위기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에도 헤움 사람들은 잠재된 위기 상황에 대비해 붕어빵을 먹고, 식탁으로 만든 뗏목 위를 걸어 회당에 온다고 한다.

 

현실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 짧은 우화 한 토막을 읽는 독자들은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나라 살림을 돌보고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위정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당선을 위해 위기를 획책하거나 위기 상황에서 축복이라고 우기는 경우는 너무도 흔하지 않던가.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북한 군부와 접촉하여 돈을 주고 위기 상황을 조장하려 한 것이나 가뭄이나 홍수를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4대강 사업을 진행시키는 등 우리는 헤움의 현자들이 했던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현실에서 너무도 자주 목격해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듯한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경전, 철학서와 함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책 중 하나가 우화집이다. 우화가 인간 삶의 허구를 꿰뚫으며 진실과 교훈을 던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헤움 마을의 주인공들을 따라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문득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혹은 우리의 공동체가 그렇게 할 때, 헤움 사람들의 문제 해결 방식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 (p.344 '작가의 말' 중에서)

 

우화라는 게 본디 한 지역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인 까닭에 그 출처와 배경을 자세히 알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이야기는 때로 살을 붙이기도 하고, 재미없는 부분은 잘려나가기도 하면서 더욱 풍성해지는 게 아니던가. 이 책의 저자인 류시화 시인은 그의 친구인 레나타 체칼스카 교수가 기분 전환 삼아 읽어보라며 보내 준 짧은 이야기 한 편이 45편의 우화가 실린 우화집을 출간하게 된 계기라고 설명한다. 류시화 시인이 흥미를 보이자 그녀는 150년 전 폴란드에서 발간된 신문과 잡지들까지 뒤져가며 거의 매일 이야기들을 보내 주었고, 류시화 시인은 그 스토리들에 내용과 구성을 덧보태 시인의 방식으로 다시 썼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폴란드의 작은 마을 헤움을 배경으로 전해지는 우화들을 시인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시장에서 노래하는 눈먼 거지는 천사일지도 모른다네. 그리고 그대의 아내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갖고 있을 수도 있어. 신의 계율을 압축하면 이것이라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게." (p.267)

 

세상의 바보들이 우연히 한 장소에 모여 살게 된 곳이라는 '헤움 마을', 그 마을에서 펼쳐지는 여러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우화 속 주인공들이 마치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인 양 당혹스러워지기도 한다. 위기에 대응하는 헤움 마을의 바보들이 내놓는 처방이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현자들의 그것인 양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헤움 사람들의 지혜와 수 세대에 걸쳐 지켜 온 삶의 방식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날 이후 헤움 사람들은, 바보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바깥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려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사실을 알았다." (p.339)

 

제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처럼 우리는 가끔 자신의 삶을 비춰보기 위해 삶의 거울이 되어줄 어떤 것을 절실히 요구하기도 한다. 우화는 그런 게 아닐까. 내가 처한 현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우리는 잠시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우리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삶의 지혜를 선물처럼 한아름 받아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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