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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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몸살로 며칠을 앓았다. 연말연시의 육체적인 피로도 피로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크지 않았나 싶다. 발단은 아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해 9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은 너무도 의연하게 일상을 지켜왔다. 학교 생활도, 하교 후에 가는 몇몇 학원도 힘들다는 내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사는 나나 아들을 보살피는 할머니 역시 그런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했을 뿐, 속으로 얼마나 힘들고 아파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랬던 아들이 탈이 났던 건 지난주. 잘 다니던 학원도 며칠째 빠지고 밥을 먹는 것도 깨작깨작 의욕이 없어 보였다.

 

어제 아이의 할머니로부터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그동안 꽁꽁 감추어 왔던 아이의 속내를 듣고 어찌나 안쓰럽던지 혼자 한참을 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위로를 하고 용기를 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일 때문에 잠시 외출을 했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눈물로 시야가 번져 운전을 할 수조차 없었다. 나야 그렇다지만 아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집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과 통화를 했던 건 늦은 밤이었다.

 

슬프면 슬프다고 말해도 된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언제든 나에게 말해주면 좋겠다고는 했지만 정작 아들은 나에 대한 걱정이 더 큰 듯했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나는 톰 말름퀴스트의 소설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마저 읽었다. 읽기 시작한 지는 꽤나 오래되었지만 읽다 말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던 책이었다. 재미가 없어서라기보다 아내를 잃은 톰의 상황이 나의 상황과 겹쳐지면서 슬픔이 북받쳤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뉘그렌이 말한다. 그럼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내가 묻는다. 부인의 치료를 조금 더 계속해보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가망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대략 한 시간쯤. 나는 카린의 뺨에 양손을 얹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어준다. 땀이 배어 나와 있다. 아내와 단둘이 있게 해줄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시간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p.106)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은 평범하기만 했던 우리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치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양 담담하게 쓰고 있다. 약 1개월 반 후면 아빠가 될 예정이었던 톰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내 카린과의 결혼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린이 고열과 호흡 곤란으로 병원에 실려 가며 모든 게 바뀐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과 함께 뱃속의 아기를 살리기 위한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간다.

 

미숙아로 태어난 딸 리비아를 돌보면서 아내 카린의 병간호까지 감당해야 했던 톰은 순식간에 변한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톰과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 카린은 세상을 떴고, 신생아인 딸과 톰만 남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내가 죽는 바람에 리비아는 법적으로 딸이 아닌 동거인에 불과했다. 리비아에 대한 법적 문제를 처리하며 카린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톰. 책에는 톰과 카린이 만나 같이 살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톰에게는 또 다른 상실의 고통이 이어진다.

 

"나는 장례식 추도문을 쓰면서 카린의 머리빗을 옆에 두고 글이 막힐 때마다 카린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문지른다. 계단에서 이웃집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부엌 환풍기가 휭휭 돌아가는 소리, 환기구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 창문 아래 룬다가탄에서 띄엄띄엄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여느 때와 똑같다. 여느 평범한 날과 똑같다." (p.284)

 

미국 월가의 허상을 파헤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저서 <블랙 스완>에는 재미있는 비유가 나온다. 칠면조의 주인은 천일 동안 매일 먹이를 갖다 준다. 칠면조는 먹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주인이 자신에게 선의를 베푼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친절한 먹이주기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믿음은 한층 견고해진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을 앞둔 날 친절하기 그지없던 주인의 손에 칠면조는 죽임을 당한다. 과거 경험으로는 결코 자각하거나 예측할 수 없었던 극단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러니 경험에서 얻은 지식에 의지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일인가.

 

우리는 누구나 타인에게 일어나는 불행이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산다. 다른 사람에게는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도 자신만은 예외로 비껴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무심한 듯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 물론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세상을 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일상에 대한 고마움은 저만치 사라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톰 말름퀴스트의 소설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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