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손홍규의 산문집을 읽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이유로 주눅이 들곤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어두운 방 한켠으로 달아나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무릎 꿇고 손을 드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두어 시간쯤 혼자만의 깊은 반성 정도는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세상에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을 일일이 다 알아둘 필요야 없다 할지라도 제 나이에 걸맞은 평균적인 앎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효자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도 제 부모가 지나온 삶의 여정을 더듬고 이해하면서 그 지난한 과정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것만 같다. 이러한 느낌은 작가의 글이 주는 엄숙주의에서 비롯된다. 웃음기 쏙 뺀 그의 글은 단정하다 못해 서릿발처럼 엄격하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작가 개인의 자서전적 성격이 짙은 산문집인 까닭에 작가의 성장 배경과 소설가로서의 꿈과 희망, 문학에 대한 작가의 소신, 그리고 소설가인 작가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모습 등 다소 주관적인 이야기가 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독자층으로부터 공감을 득하는, 말하자면 작가 개인의 사생활이나 개인적 소신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까닭은 작가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작가의 부친이 탈곡기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잃고 절망한 나머지 크지 않은 논을 처분하여 중고 트럭을 샀고, 모친과 함께 행상에 나섰다. 옷과 신발, 그릇, 잡화, 닭, 청과 등을 팔고 다녔는데 장사 수완이 없었던 터라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이를 두고 작가는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다"고 썼다. 십여 년의 트럭 행상을 접은 후 조경업체 날품팔이로 칠팔 년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전지작업을 하기 위해 높은 사다리에 올랐다가 떨어져 크게 다쳤고, 수술을 하기 위해 마취실 입구에서 섰을 때 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잡았던 기억을 들려준다.

 

"당신의 손이 내 손안에서 어린 새처럼 떨었다. 당신의 두 눈은 이미 갈쌍갈쌍했다. 마취사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온 생애인 듯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 다시는 그럴 수 없는 것처럼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것처럼 아버지의 손을 쥐고 있었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p.79)

 

그의 또 다른 산문집 <다정한 편견>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글을 읽다 보면 지금은 쓰지 않는 낯선 단어들로 인해 책을 덮고 사전을 뒤적여야 하는 순간들을 종종 맞게 된다.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국어사전을 뒤적였던 건 대학 시절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읽은 이후 손홍규의 산문집이 유일하지 싶다. 어쩌면 우리는 잊혀가는 한글을 되살리려는 노력도, 그런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작가 개인에게 미칠 수도 있는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도 점차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손홍규의 가치는 그 지점에서 발화된다.

 

"같은 낱말이라 해도 사전에 있을 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 아름다운 이유 역시 그 낱말을 발음하는 이의 사연이 담겨서라는 걸 뒤늦게 깨달으면서 정작 내가 흉내 내야 했던 건 할머니의 말투와 어휘가 아니라 당신이 세계를 바라보던 방식, 고달프고 끔찍하며 비참했으나 누구보다 낙관적이었던 당신의 태도였어야 한다는 후회가 찾아왔다." (p.45~p.46)

 

어린 시절 작가와 내내 같은 방을 쓰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신 할머니, 고모의 죽음, 작가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팔아야만 했던 소, 대학시절의 문학 동아리 활동과 파란만장했던 대학 생활과 군대 시절의 기억, 터키 이스탄불에서 만난 '야샤르 케말' 등 그가 절망 속에서 고드름처럼 키워온 문학적 소양은 이 겨울의 한파처럼 매섭고 눈물겹다. 이십대 후반까지 농민이 되기를 꿈꿨던 그가 갑오농민전쟁 사료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는 '형님들의 서글픈 진심'. 농민 따위는 되지도 말고 생각도 말라며 윽박질렀던.

 

"글을 쓰는 시간보다 아직은 글을 읽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읽는 이유는 영감을 받기 위해서고 영감이 필요한 이유는 글을 쓰지 못해서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나면 삶의 일부를 낭비해버린 듯 허탈하기까지 하지만 좋은 글을 읽게 되면 외려 과분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송구하기까지 하다." (p.303)

 

바람이 차다. 작정한 듯 불어오는 바람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오래 기억하라고 다그치는 듯하다. 인간은 절망을 딛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지만 때로는 절망 앞에서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는 경우도 흔히 보지 않던가. 시가, 소설이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켜켜이 절망이 쌓일지언정, 마음을 다쳐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지언정 우리는 끝끝내 그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더는 슬픔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라는 작가의 다짐, 그 문장을 읽는 우리도 다시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지금은 다시 희망을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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