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 오지은의 유럽 기차 여행기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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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분단 70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과 북은 급격히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북한 땅을 밟아보지 못했기에 마치 동아시아의 작은 섬처럼 살아왔던 게 사실이다. 그게 뭐 불편하다거나 불행하다는 현실 인식도 없이 해외로 나갈 때는 으레 비행기나 배를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여겨왔다. 그러나 남과 북의 정상들이 몇 차례 회담을 하고 냉랭했던 분위기가 점차 풀리면서 우리는 기차를 타고 머나먼 이국땅을 밟아보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언제가 될지 기약은 없지만 기차를 타고 떠나는 먼 나라로의 여행을 우리는 비로소 현실에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지은의 유럽 기차 여행기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는 조금쯤 특별하게 읽혔다. 시적인 가사로 리스너들의 사랑을 받는 뮤지션이자, 자신의 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낼 줄 아는 작가, 오지은. 나는 예전에 읽었던 그녀의 에세이 <익숙한 새벽 세 시>를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그 기억으로 인해 이 책을 손에 잡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낡은 기차를 타고 여행했던 어렸을 적 기억과 몸으로 기억되는 편안한 진동이 책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으로 비행기표를 샀다. 그냥 잘 쉬고 싶다. 그냥 신기해하고 싶다. 기차를 타고 알프스 한가운데를 달리고 나폴리에서 피자를 먹고 싶다. 그래도 될지,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오늘 내가 한 생각 중 가장 멍청한 생각일 것이리라.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P.12)

 

작가는 기차를 타고 오스트리아 빈을 출발한다. 구석에 파묻혀 있는 걸 좋아하면서 또한 여행을 좋아한다는 작가는 그래서 자신의 삶이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아이러니와의 계속되는 싸움이라고. 일상을 전투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과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을 잊기 위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 중 하나를 선택하며 중립이란 없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그렇게 양 극단을 살아간다는 게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우리들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일상은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게 전부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우울이란 그저 게으른 자의 사치쯤으로 여기면서.

 

"기차는 산의 모양을 따라 둥글게 달린다. 산의 덩치는 점점 커지고 등줄기는 정연히 서 있는 군대의 그것 같다. 너무 가팔라서 눈도 쌓이지 않은 돌산에 눈보라가 친다. 그 아래 소나무는 하는 수 없이 눈으로 새 옷을 입었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P.43)

 

책의 두께는 문고판처럼 얄팍하다. 기차를 타고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약한 진동에 몸을 맡긴 채 급할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그 정도의 두께.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의 어깨에 실린 삶의 무게도 저절로 가벼워지는 것만 같다. 삶의 고독은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벼움이다. 책임이 없다는 건 고독하다는 말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삶의 무게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건 어쩌면 단순한 응석일 뿐, 무한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기차 여행은 때론 아슴아슴 멀어져가던 기억을 눈앞으로 소환한다. 일상에서는 슬몃 눈을 감거나 일부러 외면했을 기억들. 돌이켜보면 별것도 아닌 일들이 삶의 중요한 순간으로 다가온다. 여행은 그렇게 우리의 가치 체계를 뒤흔든다. 단단하기만 했던 신념들이 하나둘 무너질 때의 쾌감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축복이다. 일상에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들. 그런 것들이 한낱 허접쓰레기처럼 변하기도 한다. 나는 이따금 그런 순간들을 경험한다. 영혼이 부활하는 순간.

 

"나에게는 병이 있다. 별것 아닌 평범한 우울증이다. 앓은 지 4년 정도 되었다. 어쩌면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이 병을 앓으면 기쁨을 느끼는 감각이 퇴화되는 느낌이다. 아무 음악도 듣지 않고 아무 글도 읽지 않고 아무 것에도 놀라지 않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미신적인 믿음에 빠졌다. 이 증상을 없애줄 성배가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믿음." (P.148)

 

우리는 그런 믿음 하나로 여행길에 오른다. 지금의 일상과 하나 달라질 게 없는 여행이라면 굳이 먼 곳까지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늘이 희끄무레 어두워지고 있다. 아늑한 우울에 한동안 빠져들고 싶은 날씨. 오지은의 기차 여행기<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는 반어법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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