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년 12월이면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한 해의 풍경을 각자 다른 시선과 터치로 경쟁하듯 그려낸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여러 작가의 중·단편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아, 사람들은 2018년을 이렇게 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설 속 풍경들에 저으기 안심이 되곤 한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작별>도 다르지 않았다. 수상작인 작가 한강의 <작별>을 비롯하여 수상 후보작이었던 강화길의 '손',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 김혜진의 '동네 사람',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 정이현의 '언니',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가 이어진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 소설에 드러난 2018년의 풍경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께가 아릿아릿 저려왔다.

 

한강의 '작별'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 존재의 삶과 스러짐에 대해 유려한 문체와 탁월한 구성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7살 연하의 가난한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광역버스를 타고 올 그 남자를 기다리다 천변의 어느 벤치에서 까무룩 잠이 들고 만다. 그 사이에 성근 눈이 내렸고 아무런 낌새도 없이 그녀는 눈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다만 왼쪽 가슴, 심장이 있던 자리만큼은 미미하게 따뜻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세 살에 결혼해 이듬해 아이를 낳았고, 올해 중학교를 졸업하는 그 아들을 십 년째 혼자 키우고 있는 그녀는 다니던 회사에서 얼마 전에 권고사직을 당한 터였다.

 

"직장인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몸의 방향을 바꾸기도 어려운 지하철에서, 언제나처럼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속해 있지 않다고, 그 주변의 어떤 사물이라고 상상했다. 자신이 손목을 끼우고 매달려 있는 끈끈한 플라스틱 손잡이, 캄캄한 지하 터널을 향해 뚫린 검은 차창, 어깨에 매달려 있는 낡은 가방, 그 속에 소리 없이 담겨 있는 지갑이나 필통이라고 생각했다." (p.28 '작별' 중에서)

 

눈사람으로 변한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슬퍼하거나 놀라지도,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도 않은 채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대비한다. 그러나 사귄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남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다니던 마지막 직장의 인턴사원이었던 남자는 한 달만에 퇴사했고 차일피일 월급을 미루던 사장을 만나기 위해 회사로 찾아온 남자와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가까워졌다. 남자는 현재 장기간 실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저녁을 먹으러 간 남자와 헤어져 아들 윤이를 만났고, 그렇게 아파트 현관 복도에서 아들과 예전처럼 끝말잇기를 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뺨과 눈과 콧날의 윤관기 조금씩 녹아, 돌이킬 수 없이 변형되고 있었다. 그녀는 같이 있겠다는 남자를 혼자서 생각을 하고 싶다며 돌려보내려 한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 자신의 삶이라고 불렸던 몇십 년의 시간에 대해, 잠시라도 제대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정말로 집중할 수 있다면, 평소라면 떠오르지 않았을 기억들을 좀 더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삼 남매가 회전목마를 타며 서로의 작은 몸들을 껴안았던 순간, 젖먹이 윤이가 깨어나 스물네 살 난 엄마를 고요히 바라보던 여름 아침 같은 순간들을 더." (p.52~p.53 '작별' 중에서)

 

모든 것이 녹아 층계참에 흥건한 물웅덩이로 남는 상상을 하던 순간, 아들 윤이로부터 걸려온 전화. 사랑한다는 상투적인 작별 인사를 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와 여자는 키스를 한다. 남자가 차가움을 견디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입술과 혀가 녹는 것을 견딘다.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그녀는 빠르게 녹아내린다.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순간들이 사라져 간다.

 

존재의 사라짐에 대해 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토록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철저하게 사물화 되어가는 소시민의 우울한 삶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관계들. 그 속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사라지는 많은 생명들. 작가는 침묵이 내려앉은 한밤중에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우리들 각자의 삶에 대해 조용히 반추하도록 한다.

 

밖에는 소설 속 한 장면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흰 눈이 분분한 거리에서 폐지 줍는 노인 한 분이 힘겹게 수레를 밀고 있다. 우리는 비록 단 하루의 삶도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살고 있지만 흩날리는 저 눈발이 누군가의 삶을 복원하고 새로운 관계를 이어주는 촉매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소멸하는 존재가 하는 작은 기도는 끝내 어딘가에 닿지 못한 채 눈송이처럼 스러진다. 우리의 삶은 눈송이가 낙하하는 그 순간처럼 가벼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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