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장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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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라면 나를 제외한 타인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의무, 또는 나의 이야기를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러한 권리와 의무를 방기한 채 타인의 삶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라치면 에트가르 케레트의 소설집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를 읽는 게 좋다.

 

"이야기 하나 해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내 집 거실 소파에 앉아 명령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지, 하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내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던 사람은 내 아들이었다.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p.9)

 

느닷없이 들이닥친 스웨덴 남자가 권총을 꺼내 들고 이야기를 내놓으란다. 이 웃지 못할 상황은 단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스웨덴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채 들려주지도 못했는데 또 다른 사람이 문을 두드린다. 이번에는 설문조사원이다. 그도 역시 리볼버를 꺼내 들고 이야기를 요구한다. 자신을 놀라게 할 이야기를 꺼내보라고 주문한다. 다른 사람이 또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피자 배달부다. 피자 상자 밑에서 식칼을 꺼내 든 남자 역시 이야기 하나를 요구한다.

 

"짧은 거 하나만 해줘요. 깐깐하게 그러지 말고. 요즘 상황이 안 좋잖아요. 실업에, 자살 폭탄 테러에, 이란인들에. 사람들은 뭔가 다른 걸 애타게 바라고 있어요. 우리처럼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뭣 때문에 이 지경까지 몰린 것 같아요? 우리는 절박해요. 절박하다고요." (p.15)

 

모르는 사람들이 흉기로 위협하며 이야기를 요구하는 상황. 나는 네 사람이 한 방에 앉아 있는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자 그들은 그건 목격 진술이지 이야기가 아니라고 항의한다. 상상력을 발휘하란다. 소설집의 표제작이자 첫 번째 이야기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그야말로 모르는 누군가가 작가의 생각 보따리를 풀어헤치기 위해 영혼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아닐까.

 

두 번째 이야기인 '거짓말 나라'는 평생 거짓말을 해온 한 남자(로비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곱 살 때 담배 심부름을 갔던 로비에는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콘을 사 먹고는 길에서 불량배한테 돈을 빼앗겼다고 했던 게 거짓말의 시작이었다. 그 후 고등학교 시절 고모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팔아 일주일 내내 해변을 빈둥거리기도 했고, 군대에서 탈영을 했으나 고모가 시력을 잃은 바람에 탈영병이 될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고, 직장에 늦었을 때에도 차에 치인 개를 수의사에게 데려갔다고 말하는 등 수많은 거짓말이 함께했다.

 

거짓말을 하고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로비에는 어느 날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마주함으로써 자신이 했던 거짓말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사후세계가 짜증난다며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풍선껌이 나오는 검볼머신에서 풍선껌을 사달라고 했다. 로비에는 잔돈이 없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하자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 살던 아파트 뒷마당의 돌 아래도 찾아봤냐고 묻는다. 잠에서 깬 로비에는 그 길로 자신이 살던 아파트의 뒷마당으로 향한다. 돌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돌을 들추자 작은 구멍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땅에 엎드려서 구멍에 손을 집어넣자 검볼머신의 손잡이가 잡혔고 손잡이를 끝까지 돌리자 그는 어머니가 있던 꿈속의 장소로 순간이동을 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던 개의 주인 이고르를 그곳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그 후 로비에의 거짓말은 조금씩 줄어드는데 어느 날 경리과의 나타샤가 상사에게 하는 거짓말을 우연히 듣게 된다.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려고 차까지 절 따라온 거예요?" "아니요." 로비에가 말했다. "몰아세우려는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거짓말을 하는 건 멋져요. 저도 거짓말쟁이고요. 그런데 당신 거짓말에 등장한 그 이고르 말입니다. 제가 뵌 적이 있거든요. 아주 특별한 분이죠.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 때문에 그분이 더 난처해졌어요.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건 다만……" (p.27)

 

1992년 등단하여 이스라엘 문학의 새로운 기수로 꼽힌다는 에트가르 케레트. 기발한 발상과 일상적인 문체의 짧은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더없이 능청스러운 그의 작품은 단지 한 번의 웃음으로 그치게 하지 않는다.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이 그의 톡톡 튀는 발상에 덧입혀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독자는 뭔가 생각할 거리를 안은 채 그의 작품을 떠나지 못하고 한동안 배회하게 된다. 내가 오늘 '거짓말 나라'를 읽고 언젠가 했던 나의 거짓말이 다른 우주의 어느 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지나 않을까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중 우주론을 신봉하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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