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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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왜곡되고, 뒤틀리고, 때로는 유리한 방향으로 적절히 가공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의 뒤편에는 언제나 미숙했던 내가 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간절히 묻고 싶었던 질문, "왜 그랬을까?"가 뒤따르게 된다. 때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 때로는 아쉬움과 탄식을 섞어.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후회나 자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독백에 가까운 질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그러나 스물둘의 나는 공무를 포옹하지 않았다. 다만 젖은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며 비탈을 내려왔을 뿐."(p.158)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나는 머지않은 시기에 그녀의 팬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작가의 글은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탄탄한 구성과 독자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묘사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작가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등장인물과 작가의 불일치는 종종 책을 읽는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곤 한다. 그러나 최은영 작가는 단 한순간도 소설을 읽는 독자의 생각을 소설 밖으로 내몰지 않았다.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희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미주는 그 착각의 크기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p.196)

 

첫 번째 소설집 <쇼코의 미소>와는 달리 두 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에 자신이 겪었던 겪었던 일들을 세월을 훌쩍 건너뛴 삼십 대 중반쯤에 떠올린다. 젊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한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소설을 구성하는 흔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최은영 작가의 간결하고 매끄러운 문체로 인해 진부하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그때의 여자의 나이가 되어 혜인은 생각한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p.231)

 

책에 실려 있는 소설은 레즈비언 커플 이경과 수이의 만남과 헤어짐을 담은 '그 여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는 옆집 친구 효진의 모습을 나의 시선에서 포착한 '601, 602',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아웅다웅 싸우면서 자랐던 두 자매 윤희와 주희의 뒤늦은 이해와 사랑을 다룬 '지나가는 밤', 고등학교 시절 통신 친구로 만났던 세 친구 모래, 공무, 나(나비)의 사랑과 그 엇갈림을 그린 '모래로 지은 집', 고등학교 시절 세 명의 단짝 친구였던 미주, 주나, 진희, 그러나 진희의 커밍 아웃과 함께 우정이 깨지고 하늘나라로 떠난 진희에 대한 책임 소재만 남아 있는 현재를 그린 '고백',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삼촌 집에 보내져 따뜻했던 숙모의 손길 속에서 자란 혜인이 삼촌의 사망과 함께 숙모와 갑자기 헤어지면서 느끼게 된 애증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손길', 우연처럼 찾게 된 아치디에서 우연처럼 찾아왔던 랄도와 하민의 사랑을 그린 '아치디에서'이다.

 

최은영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다 보면 우리는 꿈과 이상만 있고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해 뭔가 불안한, 그렇지만 가능성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기성세대와, 또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한 젊음은 언제나 반항적이고 그래서 더 외롭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격랑이 가라앉을 나이가 되면 어제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오늘이 새삼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알면서도 왜 네가 그러고 지내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까. 너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였나봐. 그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랬나봐.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저 그 마음을 억눌렀던 것뿐이었으니까."(p.94)

 

우리가 헤어졌던 건 그 시절의 다정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행복했던 어느 순간과의 이별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결국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가 아니라 지나간 삶의 어느 한 부분이었던 게 아닐까. '또 하루 멀어져 간다'고 노래했던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향해 끝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보다 더 자신만만했던 지난날의 나를 하냥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저마다의 상실의 아픔을 품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건 그 시절에 만나 사랑했던 누군가가 지구 상의 어느 곳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한낮의 가을 햇살이 따뜻했기에 다가올 한겨울의 추위가 두렵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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