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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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겉으로 크게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피지컬한 울림.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 영혼의 자연스러운 리듬일 수도 있고, 인류의 유전인자 속에 원래부터 내재된 원시 샤먼의 노래일 수도 있다. 그런 울림이 있는 글을 읽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독서에서 느끼는 공감이란 울림을 통한 재미와 글 속에 내재된 의미의 결합체가 아닐 수 없다. 울림과 의미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공감을 얻지 못한다고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볼라치면 울림과 의미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고, 황정은이 그렇고, 황경신이 그러하며, 박남규가 그렇고, 커트 보니것이 그렇다. 배수아가 그렇고, 또... 이런 식으로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가 배수아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게 뭐야?" 하는 식의 얼떨떨한 표정과 자신도 모르게 드는 '이걸 도대체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소설이 갖는 이야기의 골격을 무시한 '배수아 식' 서사, 문장의 반복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통한 강한 울림, 미화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 직설적인 화법 등은 독자들에게 '낯섦'을 넘어 '당혹감'을 제공한다. 생판 처음인 독자라면 '도발적'으로 느낄지도 모르지만.

 

"너울거리는 물결, 보이지 않는 바람, 전깃줄과 전깃줄 사이의 겨울 하늘, 외톨이 해오라기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가늘고 길며 구슬프게 늘어지는 피리소리였다. 땅거미가 진하게 내린 어스름, 공터 한구석 빨랫줄에는 잊힌 빨래가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빨래통을 든 여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피리 소리에 섞여 둔한 북소리도 둥둥 울렸다. 무거운 슬픔과 흥겨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그 기묘한 음악은 점점 가까워졌다." (p.59 '얼이에 대해서' 중에서)

 

배수아 작가의 아홉 번째 소설집 <뱀과 물> 역시 처음인 독자에게는 '당혹감'을 오래된 독자에게는 마리화나처럼 강한 '중독성'을 안겨준다. 지하 2층의 무의식층에 살짝 담갔다 건진 듯한 작가의 문체는 독자들을 '무의식'의 몫이라 했던 지하 2층 하루키 소설의 공간을 지나쳐 그 아래 원시 샤먼의 공간까지 이끄는 듯하다.

 

"여교사는 디스트라노이린 두 알을 가루내어 초콜릿 음료에 넣어 마시고 잠이 들었다. 매일 밤 잠의 세계에는 뱀과 물이 너울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뜨면, 거기 늙은 길라가 백발이었고, 우아한 갈색 모직 정장을 입었으며 등에는 갈색 소가죽 바이올린 케이스를 비스듬히 메고 있었다. 여교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애원했다.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잠도 없이." (p.213 '뱀과 물' 중에서)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 어쩌면 미래까지도 혼재된 몽환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어린시절은 망상'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이 순간을 살 뿐'이다. '모든 기억'도, '모든 미래'도 망상이며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이라는 것이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얼이에 대해서', '1979', '노인 울라Noin Ula에서', '도둑 자매', '뱀과 물',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일곱 작품이 실린 이 소설집은 마치 여러 편의 산문시처럼 읽힌다. 과거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는 듯하다가 암울한 현실로 이어지고 불안한 미래를 향해 내달리기도 한다. '한 아이의 반들반들한 껍데기 아래에는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삶이 들어있기도 한'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시간 순서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한 곳에 공처럼 둥글게 뭉쳐 놓음으로써 평면적인 우리네 삶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처럼.

 

"내가 모르는 언어로 적힌 편지는 파국을 향해 붉게 산란됐지만, 그 소리의 여운은 여전히 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에 관한, 길고, 늙고, 팔월처럼 번득이는, 한없이 섬뜩하고 한없이 음란한 편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홀로 몸서리쳤다." (p.267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중에서)

 

시간이 그려내는 잔무늬는 어차피 한 몸뚱어리 내에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며, 앞으로도 만들어지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것이 허공 속으로 흩어질 리도 없고, 우주로 회귀할 리도 없는 까닭에 작가가 그려내는 시공간처럼 그것은 하나에 속한 채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풀리지 않는 미제의 사건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해석할 수 없는 저 가을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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