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열어 놓았던 창문을 서둘러 닫게 된다. 계절은 또 그렇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뭔가 사력을 다해 매달릴 일을 찾아야겠다 생각했지만, 기대하던 그런 날씨가 막상 내 앞에 펼쳐지고 보니 숨을 헉헉 몰아쉬던 한여름에 세웠던 계획은 저 멀리 사라지고. 대신 계절을 향유하고픈 뻑적지근한 게으름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사람은 이렇게 간사하다.

 

아침에 어둑어둑한 산길을 오르는데 매일 만나는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과 능선에서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돌아서려는데, "사람이 없네요, 비가 와서."라고 말하면서 조심히 다녀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는 사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그래서 사람들 발길이 끊긴 호젓한 길을 좋아한다. 그런 날이면 숲의 새나 다른 짐승들도 소리를 죽인 채 조용하다. 등산로를 따라 약간의 어둠과 침묵에 쌓인 채 걷다 보면 내가 마치 현실 세상을 떠나 미지의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한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이따금 아침 산책을 나온 너구리나 고라니를 만나기도 하지만.

 

주 52시간 근무제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는 매우 두드러진 듯 보인다. 밤이 늦은 시각까지 2차, 3차를 옮겨가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 회식 문화도 사라졌고,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늦게까지 불을 밝히던 사무실도 일찌감치 불이 꺼진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크게 타격을 받는 곳도 많다. 대표적인 게 식당과 술집이다. 그 많던 주당들이 일찍 일찍 귀가하는 바람에 거리는 썰렁하다 못해 으스스하다. 장사가 될 리 없다. 일찍 퇴근한 직장인들은 독서를 하거나 취미 생활을 즐긴다.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영업자들은 국가를 향해 볼멘소리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자금과 뒷돈으로 흥청망청 쓰면서 수많은 자영업자들을 먹여 살리던 시대는 다시는 오지 않을 듯하다.

 

술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한다는 내 친구도 이제는 마트에서 맥주 몇 병을 사들고 집으로 향한다고 한다. 베란다에서 느긋하게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이따금 거나하게 취하면 셀카 사진 여러 장을 단톡방에 올려 선잠을 깨우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바람이 불고 있지만 마음은 콩밭으로 향한다. 어찌하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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