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을 만지다
김은주 지음, 에밀리 블링코 사진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시답잖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사람들은 대개 꼭 필요한 말보다는 필요하지 않은 말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보다는 그닥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읽어서 크게 도움도 되지 않을 듯한 그런 책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판매도 더 잘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책을 펼쳐 읽는 순간 '아, 작가라는 사람도 우리네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책을 읽고 있는 자신도 남들과 비교해서 크게 빠지지 않는다고 자평하거나 저으기 안심하게 되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1cm』시리즈로 유명한 김은주 작가의 신작 <기분을 만지다>를 읽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작가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신의 기분을 마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실감 나게 보여준다. 그러자면 그때그때의 기분을 아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기분이란 게 있으란다고 있고 사라지란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순간에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까닭에 오는 줄도 모른 채 흘려보내는 행운처럼 이때다 싶으면 주의를 집중하여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손가락에 상처가 나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아픔이 전해 온다. 그제야 손을 움직이는 순간이 이렇게 많았구나, 깨닫게 된다. 사랑에 상처가 나면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아픔이 느껴진다. 그제야 숨 쉬는 모든 순간 넌 나와 함께였구나, 깨닫게 된다." (p.168)

 

유명한 포토그래퍼 에밀리 블링코의 사진을 함께 실어 완성도를 더한 이 책은 사소할지도 모르는, 그래서 더욱 빠르게 사라질 수도 있는 소소한 일상의 기분들을 소중히 하는 게 결국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한다고 말해준다.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시시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부당한 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 등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평화를 갈구하기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은 곳이지만 그곳을 딛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수시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여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기분을 살피는 데에는 익숙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기분은 살뜰히 보살피지 못하는 게 아닌가.

 

"15분의 기분을 위해 커피 한 잔을, 2시간의 기분을 위해 영화 한 편을, 한 계절의 기분을 위해 옷 한 벌을, 그리고 매일의 기분을 위해 책 한 권을. 사소한 절망, 잊히지 않는 후회, 관계로 인한 상처, 문득 마주친 우울로부터 매일의 기분을 구하는, 완벽하진 않아도 여전히 좋은 하루를 만드는, 가장 간단하고도 섬세한 방법-. 당신에게 말을 거는 한 권의 책을 찾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즐겨볼 것. 그것이 결국 기분 좋은 매일을 만들고 기분 좋은 매일은 결국 더 나은 삶,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나 자신을 만든다." (p.6~p.7)

 

이 책에서 작가가 제안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나의 기분이 가리키는 곳에 마음의 답이 있음을 가만가만 들어보고(Listen), 내 기분의 열쇠를 타인의 손에 맡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손은 의외로 따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껴안으며(Hug), 잠시 흐려도 맑은 날이 될 수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을 극복하고(Overcome), 설레는 기분과 편안한 기분 사이의 그 공간을 사랑하며(Love), 세상으로부터 살아있는 기분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Learn), 단단한 기분이 더 빛나는(Shine) 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인생에는 다양하고도 완전무결한 순간이 있다. 친구에게 쓸 크리스마스카드를 고르는 순간, 어린 아들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입술과 입술이 만나는 순간, 생일 케이크 위 촛불을 끄는 순간, 자신이 영화배우라면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말하는 순간, 자신이 초상화 화가라면 마지막 눈동자를 완성하는 순간, 좋아하는 뮤지컬 공연의 클라이맥스에 빠져 있는 순간, 좋아하는 전복 요리를 입에 가져가는 순간, 프러포즈를 하는 순간, 프러포즈를 받는 순간, 산의 정상에서 야호! 하고 외치는 순간, 먼지 같은 잡념이나 안개 같은 걱정이 새어 들어올 틈 없이 완전무결한, 오직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 인생에 그러한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완전무결한 인생에 가까워진다." (p217)

 

내가 좋아하는 책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자기 자신 잘 대하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고 자신의 어두움과 화해를 할 때에만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자기 영혼의 나락을 들여다본 사람만이 존경심을 갖고 선입견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내 기분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답잖은 말이 누군가에게 더 큰 위로가 되는 것처럼 시답잖은 하루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다음 주 화요일이 입추라는데 볕은 여전히 뜨겁고 시답잖은 한낮에 시답잖은 글을 이리도 길게 써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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